한국일보 여성생활 수기 심사평
우연이었을까. 올해는 어머니와 딸 이야기가 최종심에 여러 편 올라왔다. 어머니가 딸의 어머니이기를 체념하는 순간에 딸의 인생이 어떻게 굴곡지워는지를, 또 그 책임을 어머니에게만 물을 수 없는 현실적인 모순을 엿보게 했다.
최우수작으로 결정된 임경숙씨의 ‘희망만을 품는 여자’는 유복하게 태어나 한 때 부러운 것 없이 지냈으나 아버지가 보증을 잘못 서 주는 바람에 가난의 구렁 속으로 치닫게 된 가족의 딸 이야기다. 아버지가 먼저 세상을 떠난 뒤에 세상에 대한 원망과 한탄으로 생을 탕진하는 어머니와 허랑한 오빠 대신 가장으로 살아가야 했던 딸의 인생은 한이 서리게 하면서도 삶에 대한 경건함을 일깨워 주었다. 어머니가 조금만 상황을 바로 보아 주었으면 딸이 힘겹게 헤쳐 나가는 인생의 등불이 되어 줄 수도 있었을텐데 싶어 깊은 숨을 내쉬게 했던 글이다. 이제 어머니와 화해해 보려는 딸의 마음이 담담하게 기술되어 있었다.
우수작은 두 편이다. 우선 양정숙씨의 ‘연필을 깍아주는 남편’은 매우 따뜻한 가족 이야기다. 폭력적인 이야기들이 난무하는 이 현실에서 이 가족 이야기는 나직하게 그러나 매우 귀하게 다가왔다. 남편은 50세가 되어 고등학교 1학년이 된 아내에게 연필을 깍아 주며 공부하고, 뒤늦게 들어간 학교에서 일어나는 온갖 이야기들을 함께 나눈다. 너는 결혼하면 아내에게 덜도 말고 더도 말고 네 아버지처럼만 해라, 라고 말할 수 있는 아내는 세상에 그리 많지 않다. 안도감마저 들었다.
김민정씨의 ‘여자’는 최우수작과 마찬가지로 어렸을 때 아버지의 폭력으로 인해 집을 나간 어머니를 스무 살 무렵부터 만나 온 이야기다. 화자는 자기를 버린 어머니를 냉소적으로 그려가지만 그런 어머니를 위해 국민 연금을 들어놓을 정도로 어머니에 대한 애잔함을 내면에 품고 있다. 다시 만난 해후도 잠깐, 어머니가 또 자기 인생을 찾아 떠나갈 때, 딸은 그 사람이 그렇게도 좋으냐 묻는다. 매만 맞지 않으면 살 수 있을 것 같아 집을 나왔는데 그 사람은 때리지도 않고 바람도 피우지 않는다고 말하는 어머니 대답을 누군들 외면할 수 있을 것인가.
다음은 가작. 미국에서 보내온 박봉금씨의 ‘기로(崎路)’는 성격이 맞지 않는 남편과 미움과 상처로 얼룩진 결혼 생활을 하다가 자식들이 성장한 다음에 떨어져 사는 과정을 그렸다. 글을 찰지게 써서 읽는 사람을 웃게도, 심각하게도 만들었다. 남편에게 썼던 편지의 내용 중 “남의 여자를 연정하고, 죽어달라 강요함을, 나 역시 그대로 따라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주기 바라면서” 라는 표현이 정확히 저간의 사정을 꿰뚫어 주었다. ‘미인 되기를 권하는 사회’의 노영선씨는 날씬해지겠다는 욕망과 그에 저항하는 식욕을 놀랄만치 신랄하게 써주었다. 몸이 상해가면서까지 다이어트에 골몰해 있는 세대의 가치 기준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재기 발랄한 글이었다.
모두에게 축하드린다. /심사위원 오정희, 신경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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