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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zine Free/ 음식 - 박재은의 음식이야기 - 직장인 '도시락 만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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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zine Free/ 음식 - 박재은의 음식이야기 - 직장인 '도시락 만들기'

입력
2005.06.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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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부터인가 젊은 사람들 가는 포차에서 ‘양은 도시락’이라는 메뉴가 생겨났다. 그 메뉴는 별 것도 아닌, 도시락 통에 담긴 밥과 계란 후라이인데 인기가 많다. 어떤 밥집은 아예 도시락 한 견에 반찬까지 챙겨 그럴듯한 구색을 맞추기도 하는데, 남녀노소가 다 좋아한단다.

경기 회복이 더뎌지면서 회사 앞 오천 원 메뉴도 만만치 않게 느끼게 된 직장인들은 도시락을 싸들고 나타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혼자 시작하지만 위생적인 찬을 곁들인 도시락 생각에, 그리하면 주 삼 만원을 아낄 수 있다는 계산에 동지들이 하나 둘 늘어나는 것.

내가 아는 어느 홍보회사는 사원 한명 당 일주일치 반찬 한 개씩을 사무실 냉장고에 넣고 나머지 5일은 밥만 싸오면 된다는 아이디어로 점심시간을 운영한다.

회사 대표가 말하기를 아이디어 회의가 필수인 홍보회사에서 전 직원이 점심마다 반찬을 나눠먹다 보니 그 단결력은 물론이고, 없던 아이디어도 밥 먹고 수다 떨다가 생겨난다는 것이었다.

듣고 보니 ‘도시락’이라는 것이 하나의 식사형태가 아닌가 생각 된다. 사먹을 돈도, 꺼리도 여의치 않았던 시절에 호구지책처럼 생겨났던 도시락은 개인적이고 실리적인 21세기의 시류에 딱 들어맞는 식사법이 될 수도 있겠다는 얘기.

♡ 계란

하루 한 알의 계란을 안 먹으면 허전한 나에게 엄마는 가난한 식단을 좋아한다 말하신다. 과음 한 다음날에는 양파 썰어 넣고 팔팔 끓이던 국물에 계란을 훌훌 풀어먹는 계란 국이, 입맛을 잃은 아침에는 계란에 빵을 적셔 지져 먹는 프렌치토스트가, 떡볶이나 비빔국수 같은 매운 양념에는 삶은 계란 한 알이 나의 레퍼토리다.

계란이 또 빛을 발하는 때가 바로 도시락 속에 넣을 경우인데 특히 체력이 달리는 직장인이나 야외에 놀이를 나간 가족들에게 요긴한 영양을 준다.

계란이 도시락에 맞춤인 이유는 조리 된 모양새가 다양하기 때문인데, 삶았을 때는 가지런히 썰어 납작하게 담으니 자리를 차지하지 않아서 좋고 풀어서 넓게 부쳐내면 주먹밥 등을 싸서 넣기 좋다. 마땅한 찬이 없어도 도시락 뚜껑을 열었을 때 노오란 계란 후라이가 흰 밥 위에 올려 있으면 뿌듯하다.

♡ 고추장

테이크아웃(포장 하여 판매장소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음식 형태)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한식 메뉴 가운데 ‘비빔밥’을 빼 놓을 수 없는데 비빔밥을 도시락에 담을 때에 포인트는 바로 고추장.

여름 날 쉬이 쉬어버리는 나물은 가짓수를 줄이더라도 고추장만 맛나면 되니까 말이다. 굳이 나물이 없어도 계란 후라이와 생 부추를 밥 옆에 챙기고 볶은 고추장 하나만 더하면 ‘인기 도시락’을 만들 수 있다. 특히 고추장을 다진 고기와 볶을 때 양파 즙이나 배 즙, 다진 매실 등을 첨가하면 살살 맴도는 향기가 고급스럽다.

생 부추만 썩썩 비벼먹는 이 메뉴는 시청 앞 어느 밥집의 것인데, 생 부추가 상할 일도 없고 피를 맑게 돌리는 역할까지 하여 도시락에 곧잘 응용하게 되었다.

도시락 틈으로 새는 김치 냄새가 사무실에 폐가 된다면 도라지나 절인 오이를 고추장에 무쳐서 김치를 대신할 수도 있고, 고추장에 케?이나 토마토소스를 섞어서 데쳐낸 닭 가슴살을 차게 무쳐내면 어른 아이 모두가 좋아하는 도시락 찬이다.

♡ 밥

도시락의 생명은 ‘밥’이다. 계란도, 고추장도 없으면 그만이지만 밥이 맛없으면 만 가지 찬이 소용없다. 분홍 매실 물을 들인 무조각도 정성껏 말아낸 계란 요리도, 백년 된 간장 레써피에 졸여낸 오징어도 ‘밥’이 맛없으면 순식간에 아쉬워 지니까.

윤기가 고루 퍼져 있고 씹으면 쫄깃한 찰기와 밥 냄새가 혀끝에 퍼지는 그런 밥은 김 가루만 뿌려서 주먹밥으로 빚어내도 모자람이 없는 도시락이 된다. 야유회 때 버스에서 배식 받는 일회용 도시락을 열어보면 건조한 모래알처럼 죽어있는 밥알에 절로 입맛을 잃어본 기억이 누구나 있을 것이다.

인스턴트 밥과 편의점의 각진 김밥이 우리 밥의 수준을 언제 그리 낮추었는지 몰라도 맛난 밥에 정성을 들이는 것은 비단 도시락 뿐 아니라 한국 음식의 기본이니 잘 지켜가야 할 듯.

올해는 유난히 불량 급식으로 화가 난 학부모들의 게시판 항의가 뜨겁다. 그러나 막상 ‘급식제’ 마저 없다면, 찰진 밥에 계란을 올린 도시락을 아침마다 싸 줄 수 있는 엄마들이 과연 몇 할이 있을 까도 의문이니 당장의 대안은 없어 보인다.

‘몸짱 엄마’가 되기 위해 헬스클럽에 다니는 시간이 도시락 싸는 시간과 바꿀 수 없이 소중한 신(新) 엄마상이 등장한 이 시대에는 그저 급식 회사들이 양심을 찾기만 ‘하염없이’ 기다려 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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