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구석구석 콘크리트 건물들 사이를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고 날아 다닌다. 흠뻑 젖은 몸을 겹쳐 누이고는 거실 창문을 열어 놓은 채 늘어지게 낮잠 자는 청춘들 위로 “여름 해는 길고 우리는 한가하다”는 대사가 흘러나올 때, 그들의 청춘이 못 견디게 부럽다. 그러면서도 한편 짠하다.
‘고양이를 부탁해’(2001)에서 소녀와 숙녀 사이에 놓인 여학생을 혼자 있기 좋아하고 쉬 마음을 열지 않는 고양이에 빗댔던 정재은 감독이 새 영화 ‘태풍태양’에서는 소년과 청년 사이에 놓인 사내아이들에게 눈을 돌렸다.
이들의 성장통을 대변하는 소재가 인라인 스케이트. 청춘은, 어른들은 절대 몰라주고 위험하며 미래가 보장되지 않는 인라인 스케이트와도 같다.
부모세대와의 갈등을 다루는 고전적 청춘영화와 달리, ‘태풍태양’ 속에는 아예 어른이 없다. 주인공 소요(천정명)의 부모는 빚 때문에 아들을 남겨 둔 채 외국으로 도피했다. 갈등을 빚는 어른이라고는 권위적인 광고회사 관계자 정도다. 어른에 대한 원망은 없다. 다만 어른이 된다는 것 자체가 고민이다.
영화 속 주인공들은 두 부류다. 미래를 고민하는 이와 미래를 외면하는 이다. 공통점은 인라인 스케이트를 미친 듯 좋아한다는 것이지만, 스케이트로 돈을 버느냐 마느냐가 문제다. 인라인계의 1인자 모기(김강우)는 그냥 재미로 탈 뿐이다. 여자친구 한주(조이진)도 그의 ‘야심 없음’을 좋아한다.
반면 갑바(이천희)는 인라인으로 성공해 후배들을 키우고 돈도 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소요는 이들 사이를, 이름처럼 ‘천천히 거닐며’(逍遙) 관찰하고 갈등 한다. 그러면서 청춘들의 여름은 뜨거운 태양을 거쳐 거친 태풍을 지나 다시 뜨거운 태양처럼 빛나기 시작한다.
이 영화가 사랑스러운 이유는 스토리 라인보다는 건강한 이미지에 있다. 인라인 연습하는 공원의 돌에 물을 주고 사랑을 속삭이다가, 도시를 놀이터 삼아 쌩쌩 활보하고, 웃통 벗은 채 당당하게 버스를 타는 등 주인공들의 건강함은 너무도 아름답다.
달파란과 DJ소울 스케이프의 음악은 영화에 생기를 불어 넣어주고, 김강우를 제외하면 신인에 가까운 주인공들의 연기는 풋풋하고 신선하다.
그러나 성장영화라는 압박 때문일까? “나중에 남들은 다 자동차를 가졌는데 우리에게 목발 밖에 안 남으면 후회 안 할 자신 있어요?” “왜 우리가 좋아하는 일은 아프고 상처가 남냐”는 식의 ‘어른되기’를 강요하는 듯한 대사가 다소 걸린다. 어떻든 서른 여섯 나이에 청춘의 모습을 이토록 펄떡거리게 담아낸 정재은 감독의 감성이 부럽다.
최지향기자 mist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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