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에서 소설은 그나마 융통성이 큰 장르라고 생각해요.”
배수아씨의 이 말은 신작 ‘당나귀들’(이룸 발행)의 ‘비소설적’ 성격을 두고 몇 마디씩 오간 뒤에 나온 말이거니와, 그 ‘융통성’은 책의 화자인 ‘나’가 “서로의 기호가 너무나 견고한 취향의 벽 속에 갇혀 있는” 책에 비해 “음악은 포용력이 아주 큰 예술”이라고 평가하는 대목과 겹쳐 들렸다.
그는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소설가보다 작가로 불리는 게 더 좋다”고 했다. ‘당나귀들’은 그 경계의 배수아씨가 소설의 너른 품에 기댄 ‘장편소설’이다.
책에는 장(章)의 구분 하에 별도 제목을 단 8개의 비교적 독립적 작품들이 병렬돼있다. 각각의 장들은 작가인 듯한 ‘나’가 문학과 음악 역사 언어 등에 대한 여러 단상들을 독백이나 사유로, 직설화법으로 전개하는 일종의 변주들로 통합된다.
작가는 당초 제목을 ‘파르티타’(partitaㆍ모음곡, 또는 다악장 형식의 작품)로 할 생각도 있었다고 한다. 그것을 다분히 도발적인 제목으로 바꿔 낸 것은, 어쩌면 화자 ‘나’의 말처럼 견고한 취향의 벽 속에 갇혀, 밖을 부정하고 폄하하는 동시대에 대한 냉소와 조롱의 의미인지 모른다. 알다시피 ‘당나귀’는 동서의 여러 속담 격언을 통해 무식하고 고집 센 바보로 낙인 찍힌 동물이다.
그 조롱은 ‘나’를 향한 것이기도 하다. “‘나는’으로 시작하는 문장을 무의식적으로 점점 더 자신만만하게 사용하는…” ‘나’에 대한 사유는 ‘성향의 리버럴한 불확정성’에 안주한 채 마치 스스로를 조형해내는 것이 권리인 듯 인식하는 ‘당나귀스러움’으로 귀결된다. 그것이 ‘나’의 인식처럼 “(계몽의 시대를 거치지 않고)굶주림의 시대에서 천박의 시대로 바로 월반해버린 우리 역사”에 기인한 것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개인의 정체성이란 언제든지 누구나 입고 벗을 수 있는 가상의 화려한 비단옷과 같”(22쪽)다는 사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번 ‘나’라는 인칭으로 문장을 시작할 때마다 빠져 나올 수 없는 부끄러움의 깊은 수렁에 빠”지고 만다는 현실이 안타깝고 아플 따름이다.
하지만 ‘당나귀스러움’을 자각한, 곧 운명적 수렁을 아는 당나귀 삶의 의미 찾기는 처절하다. “황야에서도 자신이 가야 할 방향을 알고 달리는 비루먹은 당나귀가 그 자리에서 고정된, 금덩어리로 만들어진 아랍산 순종 말을 탄 황제의 조각보다 더 고귀한 법이지.”(30쪽) 그 같은 자각은 ‘나’의 예술에 대한 관점이나 지향의 층위로 연결되면서, 언어를 도구로 사유하고 작업하는 자로서의 선언적 자의식으로 귀결되기도 한다.
“난 어떤 하나의 문학적 언어가 ‘완성’의 단계에 가 닿을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고, 도구로서의 언어가 항상 폐쇄적인 룰을 갖고 있다고 믿지는 않아.… 적어도 나는 가능한 한 최경계에서 작업하고 싶어.”
“작가란 동시대 정신을 대표하는 자가 아니라 그 경계에 있는 자라고 생각해요.” ‘시대정신’의 한 가운데에서 먼 경계(境界)를 바라볼 때의 낯섦과 불편함이 혹 포용해야 할 것에 대한 경계(警戒) 징후는 아닐지.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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