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전 대통령에 관해 글을 쓸 때는 신경이 많이 쓰인다. 스스로 갈등을 느끼는 부분도 있고, 쓴 뒤 감당해야 할 반응이 반갑지 않기 때문이다.
균형을 잡기 위한 ‘경제를 발전 시킨 공로도 충분히 인정해야 하지만…’ 등의 전제가 사용된다. 하지만 박정희 향수를 느끼는 사람에게는 웬만한 비판이 통하지 않는다. 최근만 해도 부정적인 면을 과감히 파헤친 ‘만화 박정희’가 출판되고, 김형욱 김재규 등의 음습한 비화가 폭로되었다. 그러나 현재에 미치는 망자의 영향력은 쉽게 줄어들 것 같지가 않다.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는 ‘창작과 비평’ 여름호에 실린 ‘박정희 시대를 어떻게 생각할까’란 글에서 의례적 ‘균형잡기’조차 비판하고 있다. 독재ㆍ인권유린과 경제발전의 상반된 양면을 종합하고, 그 양면이 어떻게 상호 연관되어 있는가를 밝혀야 한다는 것이다.
그 질책에 부끄러우면서도 궁금해서 책장이 빨리 넘어갔다. 그렇다.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인상비평이 아니라 체계적ㆍ객관적 분석일 것이다.
그 글은 물론 단순하지 않았다. 경제성장에 일정한 평가를 해줌과 동시에, 그 경제전략 중 무엇이 아직 유효하고 박정희가 침해한 민주주의ㆍ민족화해 등과 어떻게 결합될 것인가를 탐구하자는 것이다.
그는 군사 문화와 대대적 환경파괴에 근거한 박정희 식 경제발전은 지속불가능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한편, 그때 이룩한 경제성장과 자본축적을 토대로 오늘날 좀더 지속가능한 발전을 논할 수 있게 된 점은 무시할 수 없다고 지적하고 있다.
친일행위와 동료 배반, 쿠데타, 국가 전체를 개인 영지처럼 만든 유신체제, 긴급조치 등 불미스러운 이력과 포악한 통치도 비판되었다. 박정희의 경제적 공로를 인정한다면 그 독재에 저항했던 민주화운동 세력은 어떤 의미를 갖는 걸까.
그는 국가 경제발전이 박정희 18년으로 끝나지 않게 된 데는, 즉 발전이 지속가능하게 된 데는, 환경론자와 민주화 세력의 저항이 필요했으므로 그들의 ‘경제적’ 공헌 또한 인정해야 옳다고 주장한다.
백 교수는 또 당시 ‘잘 살아보세’라는 구호의 핵심이 ‘우리도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처럼 살아보세’라는, 걸인의 철학에 다름 아니라고 꼬집는다.
이런 소망은 ‘더 잘 먹고 더 잘 사는 사람들처럼 살아보세’로 진화할 뿐, ‘잘 사는 것’의 참뜻에 대한 성찰이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님을 자주 실감한다는 것이다. 그의 이런 견해는 지난해 호주의 세미나에서도 발표되어 약간의 논란이 일었다고도 밝혀놓고 있다.
백 교수 글의 서ㆍ본론은 복합적이지만, 결론 부분은 비교적 선명하다. ‘박정희 향수’라는 이름으로 그 시대에 대한 모든 긍정적 평가를 배제하는 것은 아니지만, 오늘날 제2의 박정희가 해결책이 못 되는 것만은 분명하다고 단언한다.
걸인의 철학 이상의 개인적, 공동체적 철학에 대한 무지 등을 내장하고 있는 박정희 향수야말로 박정희 시대 최악의 유산에 속한다는 것이다.
아둔한 탓에 아직 명료하게 와 닿지 않는 부분도 있지만, 이 글은 개인적으로 근래 어떤 글보다도 균형감 있고 명료한 독후감을 주었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보수 언론들의 보도방식이다. 백 교수가 이 글로 박정희를 높이 평가하고 명백하게 인정한 것처럼 보도하고 논평한 것을 보면 입맛이 쓰디쓰다.
백 교수가 박정희의 경제적 공로를 인정하고 그 경제정책이 더 유효했을 것이라고 평가한 것을 부인할 생각은 없다. 그것이 오히려 냉철한 학문적 태도라고도 믿는다.
그러나 그 언론들은 이 부분을 강조하면서 훨씬 많이 다뤄진 독재와 인권유린, 철학적 한계, 민주화운동 세력의 공로, 박정희 향수의 허상 등을 거의 외면하고 있다. 이런 독법은 진지하게 객관적 분석을 시도한 학자를 모독하고, 공정한 역사평가를 방해하는 것이다. 우리가 아직 걸인의 철학에서 멀리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인가.
수석논설위원parkrb@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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