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한 모임에서 만난 유명한 사진작가인 김중만 씨는 얼마 전 외롭게 사는 독거(獨居) 노인들의 사진을 찍은 얘기를 했다. 그는 중절모와 나비 넥타이, 투피스정장에 꽃 달린 모자로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영국 스타일의 노신사와 귀부인으로 묘사했다고 한다. 이 행사의 주최측은 정장이 독거 노인들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걱정했지만, 막상 사진으로 나타난 노인들의 표정은 그렇게 자연스러울 수가 없었다고 한다.
김 씨도 예상하지 못했던 자연스러움은 노인들의 소감으로 이내 이해될 수 있었다. 그들은 오랫동안 접하지 못했던 정장과 모자를 쓰자 잊혀졌던 즐거웠던 추억이 떠오르면서 행복하다는 느낌을 가졌다고 한다. 그 느낌이 자연스러움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김중만 씨의 얘기는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제작자인 데이비드 셀즈닉이 여배우들에게 실크 속옷을 입혔다는 일화를 생각나게 했다. "어느 장면에서도 나오지 않는 속옷들을 비싼 실크로 만들 이유가 뭐냐"는 재무 담당자들의 항변을 셀즈닉은 "남부 귀족가문의 분위기를 여배우들이 제대로 연기하려면 속옷도 그 때처럼 입어야 한다"고 일축했다. 셀즈닉의 고집은 제작비의 과다지출을 초래했지만 결국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아카데미 10개 부분 수상의 명작으로 만들어냈다. 두 사례는 시대와 배경이 전혀 다르지만, 사람들의 느낌과 정서가 일의 성패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정치도 그렇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면, 그 순간부터 정치는 자연스럽지 못하고 부담스러운 천덕꾸러기가 되고 만다. 우리 국민의 68.4%가 개혁보다는 사회안정을 바라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 최근 여론조사는 그래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참여정부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추진하는 정책에 대한 반대를 반개혁이나 수구로 비판하곤 한다. 하지만 68.4%는 그렇게 매도하기에는 너무 많다. 국민 다수가 염증을 느낀다면, 비난에 앞서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부터 가져야 한다. 하나 하나 따지자면 한이 없겠지만, 우선 떠오르는 문제점은 '말은 많은데 결과가 없다'는 것이다. 좌파 논쟁까지 불러일으키면서도 정작 사회안전망을 강화하는 정책들은 별로 없고, 균형자론을 천명했지만 주변국 어느 누구도 동의하지 않고 있다.
이렇게 잘 안 풀릴 때면 상식으로 돌아가면 된다. 국민의 바램과 동떨어진 얘기를 근사하게 하는 사람들을 멀리하고 그 반대편의 얘기를 귀기울이면 된다. 국민이 답답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런 국민이 참여정부의 출범을 가능하게 했다. 지금 참여정부에는 속옷까지 세심하게 신경쓰는 셀즈닉이 필요하다.
정치부 부장대우 leey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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