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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엄홍길이 보여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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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엄홍길이 보여준 것

입력
2005.05.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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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먼원정대’의 엄홍길 대장이 에베레스트 설봉에서 숨을 거둔 박무택 대원의 시신을 찾아 안장했다는 소식에 가슴이 찡했습니다.“차디찬 얼음산에 그 후배를 방치할 순 없다”며 시신수습을 자임했던 엄 대장과 원정대원들의 용기와 우정은 만년설도 녹일 것만 같습니다.

시신수습은 정상에 오르는 것보다 휠씬 힘들고 위험하다고 합니다. 혼자 몸으로 산소가 부족한 정상에 오르는 것도 버거운데 몇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시신을 수습해서 한참 아래에 있는 베이스캠프까지 내려와야 하기 때문입니다.

원정대는 다른 두 대원의 시신을 찾지 못한 데다 박무택 대원마저 가족의 품 대신 인근의 돌무덤에 안장하고 무거운 발걸음을 돌리면서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다고 눈물을 훔쳤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기자는 실패가 아니라 휴머니즘의 승리라고 믿습니다.

에베레스트에서 유명을 달리한 산악인이 많았지만 시신수습에 성공한 예가 없다고 합니다. 그만큼 험난한 일이기 때문이겠죠. 영국 산악인 조 심슨의 베스트셀러인 ‘친구의 자일을 끊어라’는 고산빙벽이 얼마나 혹독한 지를 잘 보여줍니다.

심슨의 자일 파트너인 사이먼 예이츠는 1985년 페루 안데스의 명산 시울라 그라데 서벽에서 자일을 잘라 45m 아래 매달려 있던 심슨을 저승이나 다름 없던 크레바스로 떨어뜨리고 맙니다.

그러나 조는 친구의 배신에 절규하며 사투를 벌인 끝에 기적적으로 생환해 체험서를 펴내지만 정작 예이츠를 원망하지 않습니다. 선택의 기로에 선 예이츠의 인간적 한계와 고뇌를 이해한 듯합니다.

엄 대장의 시신수습 소식을 듣고 불현듯 얼마전 접했던 또 다른 뉴스가 생각났습니다. 미국 국방부가 북한에서 9년 동안 계속해 온 한국전쟁 당시 숨진 미군 전사자 유해 발굴 작업을 돌연 중단했다는 소식입니다.

선제공격무기로 유명한 스텔스기를 남한에 대거 배치한 데 이어 나온 전격적인 조치라 기자 역시 한반도에 긴장이 고조되는 것 같아 안타까워하면서도‘미국은 지금도 미군 유해를 찾고 있었나!’라고 반문을 했습니다. 알아보니 미국은 육군 인사사령부 예하의 중앙유해감식소를 중심으로 발굴작업에 나서 2001년까지 미군 유해 360구를 찾아 송환을 했더군요.

만시지탄이지만 우리 역시 영화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에서 보았듯이 2000년부터 한국전쟁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을 전개해 42개 지역에서 1,000여구의 유해를 발굴하고 유가족을 찾고 있다고 합니다.

시신을 찾는 것은 시쳇말로 남는 장사가 아닙니다. 많은 시간과 정성, 돈을 들여 산과 들을 헤매야 하며, 엄 대장처럼 목숨을 걸어야 할 때도 많습니다. 그런데도 고집스럽게 찾는 까닭은 뭘까요?

엄 대장은 “친동생이 에베레스트 절벽에 누워있다면 어쩔거냐”고 오히려 반문할 터이고, 미국의 발굴팀은‘당신을 잊지 않는다’를 구호로 내세우고 있습니다. 양 쪽 모두 시신수습은 산자가 죽은자에 대해 져야 할 최소한의 책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승과 저승 사이에도 마치 자일처럼 서로를 믿고 또 책임져야 할 끈이 있는 모양입니다.

정작 안타까운 일은 우리 사회에 소중한 끈이 얇아져 끊어질 듯 위태롭다는 점입니다. 이윤지상주의와 인기영합주의가 더욱 기승을 부리면서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나라 곳곳에서 반목과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있습니다.

순국한 군인의 아내와 고관대작의 자손들이 고국을 등지는 것은 우리 사회의 끈이 얼마나 허약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엄 대장의 영웅적인 원정이 믿음과 신뢰의 부활을 알리는 단초가 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김경철 체육부장 kc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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