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3’는 이제 옛말입니다. 디자인도 투박하고 품질까지 떨어지는 데다 기름 값도 많이 드는 미국 차를 누가 사겠습니까.”
미국 뉴욕시 맨해튼의 수입차 거리인 11번가에서 현대자동차 딜러점을 운영하고 있는 빈센트 테피디노 사장은 지난 23일 GM, 포드, 크라이슬러 등 이른바 ‘빅3’ 판매 동향을 묻자 이렇게 말했다. 그는 “미국 고객들은 이미 경쟁력을 상실한 미국 차에 등을 돌린 지 오래”라며 “더 이상 ‘빅3’는 없다”고 단언했다. 스탠더드 앤 푸어스(S&P) 등 신용평가기관들이 잇따라 GM과 포드에 대해 투자 부적격(정크본드) 판정을 내리는 데도 미국 소비자나 정치권이 오히려 냉담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라는 게 테피디노 사장의 설명이다.
미국의 ‘빅3’는 왜 추락했을까. 이 문제를 이해하려면 1990년대로 시계 바늘을 돌려야 한다. 당시 세계 자동차 업계에는 ‘자동차 과점화 가설’이 팽배해 있었다. 보스턴컨설팅그룹과 프라이스워터하우스쿠퍼스(PWC), 미시건대 자동차 연구소 등은 초대형 완성차 업체 3~5곳이 세계 자동차 시장의 인수ㆍ합병(M&A)을 주도, 마지막 승자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고질적인 공급 과잉에 시달리고 있는 자동차 업계가 차세대 자동차 개발에 쏟아부어야 할 막대한 비용 등을 감안하면 결국 대형 업체들만 살아남을 것이라는 논리였다.
실제 GM은 이후 스웨덴의 사브, 독일의 오펠, 이탈리아의 피아트, 한국의 대우 등을 인수함으로써 규모에서 세계 최대 자동차 기업의 자리에 올랐다. 포드도 볼보, 랜드로바, 마쓰다 등을 합병했고, 크라이슬러도 98년 다임러벤츠에 인수됨으로써 몸집을 불렸다.
그러나 오토모티브뉴스데이터센터에 따르면 GM의 판매량은 2000년 859만대, 2003년도 859만대로 제자리 걸음을 했다. 포드는 같은 기간 715만대에서 654만대로 오히려 줄었다. ‘천상의 결혼’이라던 다임러벤츠와 크라이슬러의 합병은 판매량이 같은 기간 474만대에서 435만대로 하락하자 이제는 ‘신이 기업을 발명한 이후 최악의 M&A’라는 혹평을 받고 있다.
반면 M&A에 소극적이었던 도요타와 독자 생존의 길을 선택한 혼다는 꾸준히 세계 시장 점유율을 높여가고 있다. 2000년 570만대를 판 도요타는 2003년에는 678만대를 판매, 포드를 제치고 세계 2위 자동차 회사로 부상했다. BMW도 글로벌 양산업체로서의 입지는 약하지만 고급차 부문의 강점을 기반으로 품질 향상과 고급화를 통해 매출과 순익을 키워가고 있다. 판매량도 같은 기간 82만대에서 110만대로 늘었다.
‘자동차 과점화 가설’을 바탕으로 M&A를 통해 몸집 불리기에 나섰던 자동차 기업은 경영 위기로 내몰리고 있는 반면 독자 노선을 걸었던 업체는 오히려 승승장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세계 자동차 시장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이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헬무트 판케 BMW그룹 회장의 고언은 뉴 패러다임의 윤곽을 그려볼 수 있게 한다. 그는 3월 싱가포르에서 “현재 BMW그룹의 생산량은 세계 14위지만 매출액은 8위 수준이고 순이익과 연구개발(R&D) 투자는 3위”라며 “10년 후 어떤 자동차 회사가 살아 남을 지 모르겠지만 BMW는 그 중 하나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중요한 것은 규모나 순위가 아니라 핵심 역량인 기술과 이익 창출에 달려 있다는 얘기다.
이러한 변화는 2010년 연산 500만대 생산 체제를 통해 ‘글로벌 톱5’로 부상하려는 현대ㆍ기아차 그룹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1ㆍ4분기 6조1,703억원의 매출에 3,227억원의 영업이익을 기록한 현대차는 그렇다고 쳐도 4조원(3조9,389억원)에 가까운 매출에도 불구, 이익은 고작 159억원에 그친 기아차에는 빨간 신호등이 켜졌다고 봐야 한다. 최한영 현대ㆍ기아차 전략조정실장 겸 마케팅총괄본부장이 최근 “현대ㆍ기아차는 앞으로 외형 성장 일변도의 전략보다는 생산성, 고부가가치 차종 개발, 제품 품질 개선, 조직능력 강화 등 내실을 다지는 데 주력할 것”이라고 강조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뉴욕=박일근기자 ik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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