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임석재 교수의 건축, 우리의 자화상] (11) 도심 복원 문제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임석재 교수의 건축, 우리의 자화상] (11) 도심 복원 문제

입력
2005.05.29 00:00
0 0

몇 해 전 국민의 정부 시절 복원된 경복궁 건물 가운데 하나에서 기둥이 휘어 재복원한 적이 있었다. 복원을 담당한 쪽에서는 나무를 말릴 충분한 시간을 주지 않고 몰아붙여서 벌어진 일이라고 했다. 넓게 보면 우리나라 복원 분야 전반의 문제점이 드러난 현상이다. 고건축 복원의 문제점은 기술과 지역의 두 측면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기술적 측면의 문제는 정통 전통기술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대목이다 도편수다 해서 몇 분이 전통건축술의 명맥을 이어오고는 있다. 더없이 소중한 분들이지만 일각에서는 이분들이 구사하는 기술의 정확성에 대해서 말이 많다. 그렇다고 다른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다. 잘못된 것은 알겠지만 모범 정답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이다. 일제 강점기와 압축 개발기를 거치면서 우리의 정통 전통건축술은 씨가 말랐다.

전통기술의 모든 분야가 어렵고 힘들겠지만 건축술은 무용이나 창 같은 개인 차원의 예술분야와 달리 산업이 움직여야 한다. 그래서 지키기가 어렵고 한 번 사라지면 되살리기도 힘들다. 문화재의 경우 정통 전통기술로 복원해야 한다는 사실은 첫 번째 조건에 속한다. 그렇지 못하면 과거에 대해 거짓말을 하는 것이 된다. 복원은 창작이 아니다. 그 건물이 지어지던 당시에 쓰였던 것과 똑같은 기술로 지어야 한다. 이것은 한 사회가 갖는 문화력을 결정짓는 중요한 기준이다. 국력의 문제인 것이다.

지역적 측면은 도시 스케일에서의 문제이다. 더 넓게는 역사 전반에 관한 문제이기도 하다. 한 나라의 역사가 진실인지 아닌지를 보여주는 직접적 증거의 문제이다. 1800년 된 부여나 1500년 된 경주에는 그에 맞는 오래된 지역이 남아있어야 된다. 하물며 600년밖에 안 된 서울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이것은 도서관에 역사자료와 고서가, 박물관에 유물과 미술품이 얼마나 많이 남아있는가와 똑같은 문제이다. 지금까지 우리의 복원은 개별 건물과 유구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경복궁과 창경궁이 좋은 예이다.

지역의 복원은 이것을 뛰어 넘자는 것이다. 돈 내고 들어가서 구경하는 고궁 같은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사람들이 매일매일 먹고 자고 일하고 장사하는 생활의 공간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 그리고 가능한 한 중간에 공백 없이 모든 시대의 공간이 연속으로 이어져 있어야 한다. 이 기준에 의하면 지금 서울의 나이는 채 50이 안 된다. 600살임을 증명하는 건 고궁 밖에 없다. 그나마도 고궁 복원에는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은 기술의 정확도 문제가 남아있다. 나이를 먹긴 먹었는데 모든 게 부정확하다.

지역 복원의 대상으로 종로를 꼽을 수 있다. 조선시대 종로에는 중산 상인들이 운영하던 가게들이 있었다. 이것을 복원해야 한다. 청계천 복원도 중요하지만 어떤 식으로든지 종로의 복원 문제에 대한 계획도 함께 세워졌어야 했다. 세종로에 대한 계획은 간간이 제기되지만 종로에 대해서는 별 얘기들이 없다. 기회는 있었다. 거슬러 올라가면 박정희 때가 가장 좋은 기회였다. 종로에 지하철을 놓으면서 땅을 팔 때 한 층을 더 팠어야 했다. 지하철 위에 지하차도를 만들고 땅 위는 차 없는 거리로 만들었어야 했다. 그리고 양쪽에 조선시대 전통 상점을 복원했어야 했다. 그러나 무교동 골목이 고층건물로 재개발되면서 이런 기회는 영원히 사라졌다. 다소 지저분하더라도 최소한 그대로 남겨두었어야 했다. 그렇다면 지금쯤 종로 복원 논의가 시작될 수 있었을 것이다.

세종로도 마찬가지이다. 요즘 제기되는 세종로 개발안들은 공원으로 만들자는 것이다. 이것으로는 부족하다. 세종로 양편에는 조선시대 관청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이것도 복원해야 한다. 또 있다. 창덕궁-창경궁과 종묘를 자르고 지나가는 율곡로이다. 원래 세 곳이 하나로 붙어있던 것을 일제가 갈라놓았다. 명분은 도로 건설이었지만 조선의 역사를 지우려는 목적도 중요한 이유였을 것이다. 율곡로도 지하차도로 뽑고 창덕궁-창경궁-종묘를 하나로 이어야 한다. 이렇게 되면 경복궁을 시작으로 세종로의 관청거리, 종로의 상가거리, 북촌의 한옥지대, 창덕궁-창경궁-종묘 등이 어우러지는 조선시대 도심이 부활하는 것이다. 여기에 인사동과 사간동 화랑촌이 더해지면 조선시대에서 현재에 이르는 한 줄의 시간의 끈이 겨우 만들어지는 것이다.

청계천 복원은 이런 거대 계획의 일환으로 시작되어야 했다. 문화와 역사의 복원이어야 했다. 그래야 청계천의 복원 효과가 백배 살아난다. 복원 과정에서 발견된 많은 유물들이 이를 증명한다. 시간상으로도 1년 만에 해치울 일이 아니었다. 30년 계획의 첫 단추, 즉 1/30이라는 생각으로 진중하고 포괄적으로 진행되어야 했다.

그러나 실제 상황은 그 반대로 진행되었다. 개천 하나의 복원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모든 기준은 경제적 효과로 집중되었다. 고도제한 완화가 유일한 논쟁거리였다. 복원 중 발굴된 문화재들은 ‘그깟 돌덩이가 뭐 중요하냐’며 내팽개쳐졌다. 복원된 개천 주변에 새로 세울 고층 건물의 높이가 얼마나 높아질 수 있는가가 유일한 관심이었다. 이것은 결국 개천 복원해서 얼마를 챙길 것인가의 문제밖에 되지 않는다. 청계천 복원은 가장 큰 규모의 부동산 투기장이 되었다. 부동산 투기에 한가락 한다는 고수들은 다 모여들어서 로비가 난무하는 난장판이 되었다.

조선시대 도심의 복원이 너무 황당한 생각이라면 좀 더 현실적인 다른 예도 있다. 서울에 남아있는 도시형 한옥의 보존ㆍ복원 문제이다. ‘북촌’이라 불리는 가회동은 대표적인 예이다. 가회동은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기울이고 관광상품이 되어가면서 사정이 좀 나은 편이다. 이외에 돈암동이나 정릉 등지에 아직도 일부가 남아 힘들게 버티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한옥 몇 채의 개별건물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돈암동과 정릉 일대는 일제 강점기 때 한국식 전통가옥, 즉 도시형 한옥이 지어지던 지역이었다. 용산의 일본군 기지를 끼고 일본인 동네로 개발되었던 원효로-청파동-후암동 일대와 대비되는 한국인 동네였다. 남산을 경계로 지금의 강남-강북에 비유되는 ‘산남-산북’의 대비구도가 형성되어 있었다. 시간의 끈을 서울의 역사 전체로 늘리면 이 일대는 20세기 전반부 중산 시민들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다. 이 일대에 대해서는 일차적으로 아직 남아있는 한옥들을 보존해야 하고 궁극적으로는 일정한 지역을 한옥 동네로 복원해야 한다.

복원 문제는 21세기의 중요한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건축에 국한시켜 보더라도 서구 선진국에서 복원 문제는 지역주의 양식의 일환으로 편입되면서 창작 활동의 중요한 소재 역할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전통 공예기술은 흔히 신화에 비유되기도 한다. 한 나라의 민족문화, 다시 한 나라 안에서 다양한 지역문화를 이루는 요소로서 그 중요성과 의미가 신화와 같다는 얘기이다. 전통 건축술은 그 핵심이다. 전통 건축술을 보존하여 이것으로 복원작업을 하는 일은 잃어버린 신화를 되찾는 것과 같다.

우리는 이 모두를 갖지 못하고 있다. 단군신화 이외에 국민들이 알고 있는 우리 신화가 무엇이 있는가. 똑같다. 톱질이나 대패질 이외에 우리가 알고 있는 전통 건축술이 무엇이 있는가. 전통 건축술이 살아있지 못한 현상은 신화를 잃어버린 것과 같은 현상이다. 이것은 우리의 뿌리가 없다는 얘기이다. 뿌리가 없는 문화는 자본의 논리, 정치의 논리, 외세의 논리, 세대의 논리, 매체의 논리 등 다른 요소들에 의해 끊임없이 흔들린다. 이런 상황에서는 한 사회 단위의 새로운 문화 예술도 온전하게 창조될 수 없다.

이화여대 건축학과 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