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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 '작계 5029' 논란의 맹점

입력
2005.05.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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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리지 말았어야 할 상자 뚜껑이 열렸다. 뛰쳐나온 괴물이 나라 안팎을 어지럽히고 있다. 뚜껑을 연 사람들이 예견하고 의도한 그대로인지, 아니면 괴물의 능력이 예상을 뛰어넘어 제어할 수 없게 된 결과인지도 알 수 없다.

‘작계 5029’ 작성을 위한 한미 협의가 난항을 겪다가 중단되고, 초안 내용일부가 흘러 나와 안 그래도 복잡한 한반도 정세를 더욱 헝클어뜨렸다. 정부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북핵 문제 해결의 기본축으로 여겨져 온 한미일 공조에 깊고 넓은 금이 패었다. 이대로라면 6자 회담이 열리더라도 중구난방을 피할 수 없고, 그 때문에라도 회담은 더욱 열리기 어렵게 돼 가고 있다.

북한 정권의 자체 붕괴나 대량 탈북 등 ‘급변사태’를 맞아 한미 연합사가 취해야 할 행동계획을 담을 ‘작계 5029’를 둘러싼 한미 간의 이견은 그 동안 ‘미묘한 온도차’란 수사에 묻혀온 양국의 대북 인식차를 뚜렷이 확인시켰다.

그 차이는 원칙적으로 같을 수 없는 국익의 충돌에서 비롯한 본질적인 것일 수도, 단순한 방법론의 불일치일 수도 있다. 방법론의 차이라면 얼마든지 머리를 맞댐으로써 메울 수 있다. 그러나 양국이 서로 본질적 차이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을 보면 봉합 전망은 흐려진다.

혹자는 ‘작계 5029’에 대한 양국 인식차는 북한의 급변사태를 전시에 준하는 상황으로 보느냐, 평시 상황으로 보느냐는 데서 비롯한 주도권 다툼으로 보기도 한다. 전자라면 한미연합사 차원에서 미국이 작전권을, 후자라면 한국이 작전권을 갖는다. 이 정도의 차이라면 급변사태의 등급설정에 따른 단계적 대응 등의 타협책을 찾을 수 있다.

문제는 이런 주도권 다툼이 근본적 대북 시각차를 깔고 있다는 점이다. 북한을 개별 국가ㆍ지역으로 보느냐, ‘같은 민족이 사는 지역’으로 보느냐의 차이다. 적어도 ‘작계 5029’ 협상 중단을 자랑으로 삼는 당국자라면 ‘민족의 공동운명’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민족공조론’, 나아가 민족의 운명을 외세에 맡길 수 없다는 ‘동북아 균형자론’으로 이어진다. ‘민족 공동운명’을 상정한 논의에 많은 국민이 공감하는 것도 사실이다.

정부에 국가 관리를 위탁한 국민은 그런 차원에 머물러도 된다. 그러나 정부 정책이 그런 정서적 차원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국민의 안전이 최종 목표인 안보 정책이라면 더욱 그렇다.

막연한 상정과는 달리 민족과 국민의 이익은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 한국전쟁의 원인을 무엇으로 보건 결과적으로 남북 모두에서 민족과 국민은 충돌했다. 그럴 때 정부의 1차적 과제는 국민의 안전과 이익을 지키는 것이다. 이런 인식을 분명히 함으로써 ‘민족 공조’라는 극히 당연한 듯한 전제에서 벗어나면 ‘작계 5029’ 논란도 새롭게 보인다.

북한의 다양한 상황 변화를 예상해 대처방안을 수립하는 것은 국가의 기본 임무다. 중국과 일본 모두 북한의 대량 난민 발생을 중요한 안보위협으로 상정하는 마당에 휴전선 개방 여부 등은 당연히 검토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주한미군의 역할이나 중국 등 의 대응도 고려해야 한다.

이렇게 보면 ‘작계 5029’의 진정한 문제는 초안의 내용이나 미국의 태도가 아니라 그것이 공개돼 국민적 논의의 도마에 오른 것이다. 한미 양국 모두 여러 생각을 할 수 있고, 상호 신뢰만 있다면 얼마든지 조정할 수 있다. 떠들기에 앞서 미국과 중국, 일본, 러시아와 내밀한 조율을 통해 국민과 국가의 안전을 지킬 방안을 마련해 나갔어야 했다.

‘식민지 근대화론’의 원조인 카터 에커트 하버드대 교수가 방한, 균형외교론을 밝혔다. ‘동북아 균형자론’을 뒷받침한 듯하지만 한국에 있어서 “세계주의야말로 가장 강력한 방어전략이자, 공격전략”이라는 말까지 들으면 전혀 느낌이 달라진다. 북한을 개별 국가로 볼 수 있을 때 현실의 전략에 이를 수 있다는 얘기로 들린다.

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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