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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욱 파리서 권총 피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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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욱 파리서 권총 피살

입력
2005.05.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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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형욱 납치 살해 재구성

“자네에게 부여할 임무가 있네. 선택의 여지가 없어. 김재규 부장님의 지시야.”(이상열 전 주프랑스 공사)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습니다. 목표가 김형욱이죠. 보내겠습니다.(처치하겠다는 의미)”(신현진 중정 연수생)

1979년 9월 하순, 프랑스 파리 샹젤리제 거리의 ‘푸께’카페에서 은밀히 만난 두 사람은 이런 대화를 나눴다. 국정원 과거사위는 26일 밝힌 바에 따르면, 그 날 두 사람은 국가정보기관의 요원들이 아니라 범죄자들로 살해를 모의하고 있었던 것이다.

살해 지시 및 준비

두 사람의 만남 직전,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은 중정 프랑스 거점 책임자였던 이상열 전 주프랑스 공사에게 김형욱 살해 지시를 내렸다. 김형욱의 연이은 박 정권 비난을 그냥 둬서는 안 된다는 판단에서였다. 이상열 공사는 곧바로 살해 임무를 수행할 적임자 물색에 나섰다. 그는 당시 파리에 머물고 있던 5∼6명의 중정 연수생들을 자택으로 불렀다. 이 자리에서 이 공사는 “요즘 젊은이들은 패기가 없어 문제”라며 기질을 살펴보았다. 이후 연수생들에게 ‘파리주재 북한 통상대표부의 현황과 실태’ 보고서를 제출토록 하고, 이를 검토한 뒤 과단성과 적극성을 가진 신현진과 이만수를 골랐다.

9월 어느날. 이 공사는 두 사람을 파리 시내 카페에 불러 “김형욱이 곧 파리에 온다. 거액의 외화를 빼돌려 카지노에서 탕진하고 국가기밀을 마구 폭로하고 있는 사람을 그냥 둬서는 안 된다”며 마음의 준비를 시켰다. 이후 이 공사는 9월말께 더 믿음이 갔던 신현진만 푸께 카페로 불러 김형욱 살해를 직접 지시했다. 신현진은 “어려움은 없습니다. 모든 것은 제가 주도하겠습니다”고 다짐했다.

이 공사는 신현진에게 지시한 후 10월1일 비밀리에 귀국, 김재규 부장을 2차례 만나 살해 계획을 보고하고 소련제 소음 권총과 독침을 수령한 뒤 파리로 다시 들어갔다.

계획 수립 및 실행

신현진은 이 공사의 지시를 받은 뒤 평소 친하게 지내던 동유럽계 외국인 2명을 포섭했다. 미화 10만 달러를 제공하는 조건이었다. 파리 근교 ‘샤또(농원이 딸린 옛날 성)’를 빌려 그곳에서 살해하고 매장하자는 계획을 세웠지만 이는 실행하지 않았다. 신현진은 또 이만수와 외국인 친구 2사람을 서로 소개하며 친분을 쌓았고, 이상열 공사에게는 10만 달러와 권총 준비를 요청하는 등 치밀히 준비했다. 파리 시내 소재 ‘바뇰레’ 벼룩시장에서 칼과 노끈 등도 구입했다.

이 와중에 살해 당일인 79년 10월7일 오후 늦게 신현진은 이 공사의 호출을 받았다. 이 공사는 자신의 집으로 신현진을 불러 “김형욱이 돈을 빌려 달라고 전화를 했다. 좋은 기회다. 돈 있는 사람을 소개 시켜주겠다며 만나기로 했다”며 “2시간 뒤 샹젤리제 거리로 김형욱이 나오기로 했다. 오늘 처치해야 하니 이만수와 일꾼들을 불러라”고 지시했다.

신현진은 즉시 이만수와 외국인 친구 2명에게 공중전화를 이용, “샹젤리제 거리의 리도극장 앞으로 나오라”고 전했다. 그는 이 공사의 관용차를 직접 운전, 이 공사를 태우고 리도극장 앞에서 이만수와 외국인 친구 2명을 만나 살해 계획을 설명했다. 이만수에게는 10만 달러가 든 가방을 주며 ‘콩코드 라파예트’호텔 바에서 대기토록 했다.

이후 이 공사와 신현진, 두 외국인은 차량으로 리도극장에서 멀지 않은 김형욱과의 약속장소로 향했다. 이동하는 차량 안에서 신현진은 권총 1정을 뒷 자석의 외국인 친구에게 건넸다. 기다리던 김형욱을 만난 이 공사는 “운전하는 사람은 제가 아끼는 중정 연수생이고 뒷좌석의 두 사람은 소개 시켜 드리겠다고 한 전주(錢主)들이다. 나는 저녁 약속이 있으니 이들과 함께 카페로 가서 이야기를 나눠보라”고 했고, 김형욱은 이 공사가 앉았던 조수석에 탔다. 날이 저물어 자동차 전조등을 켜야 할 때였다.

김형욱을 태운 차량은 개선문 앞 로터리를 우측으로 돌아 시 외곽 순환도로로 향하고 있었다. 이때 갑자기 뒷좌석의 외국인이 김형욱의 머리를 주먹으로 수 차례 가격, 실신시켰다. 승용차는 교외로 이동, 인적이 드문 작은 숲에 다다랐다. 외국인 두 명이 김형욱을 끌고 나가 숲속으로 들어갔다. 30분쯤 후 돌아온 외국인은 신현진이 기다리던 차에 오르며 김형욱이 입고 있던 바바리 코트에 여권, 지갑, 시계 등 소지품을 싸서 벨트로 묶어 건넸다. “김형욱 머리에 권총 7발을 쏘아 죽였다. 시체는 낙엽으로 덮어 버렸다”는 설명이 뒤따랐다. “잘했어”라는 신현진의 답이 이어졌다.

신현진은 “권총을 잃어버렸다”는 말에도 개의치 않고 현장을 급하게 떴다. 호텔에서 기다리던 이만수에게 간 신현진은 10만 달러가 든 가방을 외국인에게 건네고 “프랑스를 떠나라”고 말했다.

사후 조치 및 보고

신현진은 곧바로 이상열 공사 집으로 가서 보고했다. 이 공사는 “수고했다. 물품을 철저?인멸하고 즉시 귀국하라”고 말했다. 신현진은 김형욱의 시계는 파리 세느강에 버렸고, 바바리코트와 벨트는 자신의 숙소에서 가위로 잘게 썰어 쓰레기통에 버렸다.

신현진은 사건 3일 뒤인 79년 10월10일 귀국했다. 13일께 김재규 부장에게 결과를 보고했고, 김재규는 “수고했다. 그런 놈을 그냥 두면 우리 조직은 뭐하는 곳이냐”며 현금 300만원과 20만원이 든 봉투를 각각 두개씩 건넸다.

하나는 추후 이만수에게 전달됐다. 김재규는 신현진에게 “내 직속인 정책연구실에서 근무하라”며 발령을 내줬고, “40~50평 정도의 집도 알아봐 주겠다”며 비서에게 연락하라고 전화번호를 적어줬다.

이상열 공사도 79년 10월 18일 은밀히 귀국해 김재규 부장에게 보고하고 그 다음 날인 10월 19일 파리로 돌아갔다. 이만수도 귀국 후 당시 김일곤 차장보에게 보고하고 상당히 많은 돈을 받았다. 국가정보기관에 의한 살해가 마무리되는 순간이었다.

정녹용 기자 ltrees@hk.co.kr

■ 5·16핵심 中情 부장 지내… 美 망명후 反 정부활동

김형욱씨는 5ㆍ16 핵심인 김종필씨 등과 같은 육사 8기 출신으로 중령 때 가담한 쿠데타가 성공한 뒤 불과 2년 만인 1963년 7월 중앙정보부장이 됐다. 이후 3선 개헌을 주도하는 등 박정희 정권의 정치공작을 도맡았으나 69년 10월 전격 해임되면서 박 대통령과 멀어졌다. 김씨는 유신 직후인 73년 3월 유정회 국회의원 명단에도 빠지자 한 달 뒤 미국으로 망명, 반 정부 활동을 벌였다.

김씨는 박동선씨를 통한 박 정권의 미 의회 로비의혹을 조사하던 미 하원 프레이저 청문회에 출석해 박 대통령의 비리를 폭로했다그러나 청문회의 조사결과 김씨 본인도 1,500만~2,000만 달러를 치부해 해외로 빼돌린 뒤 고급주택에 거주하면서 자녀들에게 벤츠 승용차를 사주고 카지노에 빠져 한 번에 수 만 달러를 탕진하는 등 방탕하게 생활한 것으로 드러났다.

한편 김씨의 폭로로 치부가 드러날 것을 두려워 한 박 대통령은 정일권, 김종필, 김동조, 오치성씨 등 측근들을 밀사로 보내 귀국을 종용하고 돈으로 회유했으나 번번히 실패했다.

김씨는 박 정권의 비사를 담은 회고록을 쓴다고 공언, 이에 놀란 박 대통령이 78년 12월 보낸 윤일균 중정 해외담당차장으로부터 50만 달러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김씨는 79년 4월 회고록을 출간했다.

김씨는 해외재산도피, 회고록 출간, 반한 활동 등으로 박 대통령의 배신감이 극에 달했던 그 해 10월1일 파리로 갔다. 그 목적에 대해선 국내 연예인과의 밀회설 등 추측이 분분하다.

김씨는 파리에 도착한 지 일주일 뒤인 7일 저녁 시내의 한 도박장에서 마지막으로 목격된 뒤 실종됐다. 당시 박 대통령이 김씨에 대한 회유가 실패하자 중정을 통해 살해했다는 소문이 파다했으나 구체적 경위는 지금까지 미스터리로 남아있었다.

이동국기자

■ 이상열씨는 진술 거부

국정원 과거사위는 김형욱 실종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해 김씨 살해에 가담한 중정요원 등 관련 인물 33명을 면담 조사했다.

이들 중 김씨 살해에 직접 참여했다고 시인한 사람은 신현진, 이만수(가명)씨 등 2명. 과거사위가 밝힌 구체적 정황도 대부분 신씨의 진술을 근거로 했다. 반면 과거사위가 책임자로 지목한 이상열 당시 공사는 진술을 거부했고, 이만수씨도 구체적 진술을 피했다.

과거사위는 중정이 조직적으로 개입했는지 밝히기 위해 당시 윤일균 해외담당차장등 해외라인 5명, 영국 등 인접국 요원 4명 등도 조사했으나 “이 공사가 개입됐다”는 진술을 얻는 데 그쳤다.

과거사위는 또 10ㆍ26 사건직후 김재규 중정부장을 조사했던 당시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과 이학봉 수사국장 등 신군부 핵심세력도 조사했으나 “전혀 모른다”는 답만 들었다. 과거사위는 이밖에 “중정이 김씨를 파리로 유인하는 과정에 관련된 것으로 의혹이 제기된 연예인 최모, 정모 등 여성 3명도 조사했으나 개입정황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앞서 과거사위는 국정원 존안자료 76건, 본부와 파리 등 해외거점 사이에 오간 중정 전문 등 672건, 김재규 사건 공판기록 등 군 수사자료 등 794건의 문건을 확보해 1차 분석을 벌였다. 그러나 공작계획서 등 결정적 자료는 찾지 못했다. 그나마 박정희 대통령이 김형욱의 반한 활동에 격앙돼 중정에 보낸 특별 지시내용, 파리에서 활동중인 중정요원들의 사건 전후 출입국 기록 등이 도움이 됐다.

이동국 기자 eas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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