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Weekzine Free/ 패밀리 - 평등 문화 가꾸는 남성모임 창립 10돌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Weekzine Free/ 패밀리 - 평등 문화 가꾸는 남성모임 창립 10돌

입력
2005.05.26 00:00
0 0

“본인만 의식이 깨어 있다고 해서 하루 아침에 평등 문화가 성립되지는 않아요. 사회 속에 뿌리 내린 가부장적인 남성 위주의 가치관을 바꾸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죠. 생활 속의 작은 변화들이 일어날 때 그것이 바로 평등 문화로 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서울 여성의 전화’(대표 황경숙) 산하의 ‘평등 문화를 가꾸는 남성 모임’이 4월 29일로 10주년을 막 넘겼다. 남녀가 함께 하는 사회를 만들자는 소망으로 우리 사회에 신선한 자극을 제공, 화제를 일으켜 왔던 이 모임의 주인공을 만나 속내를 들었다.

회장 한상춘(36ㆍ공무원)씨를 비롯, 권오광(48ㆍ한국 파트너쉽 연구소 연구원), 김올튼(22ㆍ성균관대학 정치외교학과 3학년ㆍ‘올바르고 튼튼하게’ 라는 뜻)씨 등 3명이 서울 중구 장충동 1가 여성의 전화 사무실에 모였다. 약속이나 한 듯 내부에 도사린 남성중심적 가치관을 화두로 운을 뗐다. 각자 나름대로는 평등을 지향한다고 생각하지만 그 사실을 발견하고 가끔 놀란다는 고백이다. 10여명의 회원으로 구성돼 한 달에 한 번 꼴로 모임을 갖는 이들.

결혼 후 기다렸다는 듯 곧 바로 아내와 가사일을 분담한 권씨조차 예외일 수 없었다. 그는 “빨래와 설거지는 내가 하고 청소와 밥은 아내가 한다, 이런 식으로 조목 조목 정했는데 그러다 보니 어느 날부터 싸움이 시작되더라“며 신혼 초의 시행 착오를 돌이켰다. “제가 할 일을 제대로 안 할 때, 아내는 불만이었죠. 사실 아내가 좀 해 줬으면 하고 은근히 바라던 마음이 왜 없었겠어요? 일하고 들어 오면 쉬고 싶으니 제 입장만 생각했던 거죠.” 놀이방에 맡긴 아이를 찾는 일이 당시 제일 큰 문제였다고. 여자와 남자 밥상을 따로 두고 식사를 했을 만큼 가부장적인 분위기에서 자랐던 그로서는 차라리 당연했다는 설명이다.

집으로 가는 길 내내 아이를 그냥 둔 아내에게 화가 났다고 한다. “빨리 퇴근하는 사람이 아이를 데려오기로 약속하니까 자꾸 미루게 됐어요. 몇 번을 미루다가 하루는 늦은 밤 아이 친구 부모로부터 전화를 받았어요. ‘아이가 하루 종일 우리 집에 있는데, 데려가 달라’더군요.” 그러나 부아도 잠시. 그는 “아이가 친구 침대에 쓰러져 자고 있는 모습을 보고 나니 마음이 찡 하면서 제 자신을 돌아보게 됐다“며 “의식은 깨어 있다고 주장하고 다녔지만 실제로는 무의식적으로 아내한테 미루고 기대했던 부분들이 많았다”고 말했다.

한상춘씨는 ‘장남 콤플렉스’를 앓고 있다. “아내가 직업이 있는 데도 불구, ‘맏며느리의 역할’을 떠맡고 있는 데는 제 책임도 있어요. 항상 우리 가족 모임에서는 아내가 해야 할 일이 제일 많았고, 괜히 식구들 눈치 보느라 제대로 도와 주지도 못 하고 누나들한테 도움을 청하지도 못하는 그 애매한 상황…. ” 분명 의식은 깨어 있지만 현실에서 어떻게 표현해야 할 지 모른다는 하소연이다. 그는 “아내가 시댁에 하는 만큼 나는 처가에 잘 하지 못 하는 게 못내 마음에 걸린다”며 노력을 다짐했다.

미혼인 올튼씨 역시 나름의 고민이 있었다. 그는 “가끔 선후배들과 우리도 모르게, 여자의 외모를 두고 은근히 공격하는 말을 내뱉을 때가 있다”며 말을 받았다. 오랜만에 우연히 만난 여자 선후배들에 ‘살 좀 뺐어? 아니 여전히 쪘네. 살 좀 빼지 이제…’ 등 농담반 진담반의 말을 늘어 놓다 보면, 어느 순간 화들짝 정신이 들곤 한다는 것. 여자 친구가 언짢아 하는 기색에 말문이 절로 닫힌다는 것. “주변 친구들도 아직 ‘성희롱’의 경계를 넘나드는 위험한 말 실수를 습관적으로 많이 합니다. ‘아차’ 싶은 생각이 들 때는 늦을 때가 많죠.”

그러나 개인적 각성만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데 동의하면서 이야기는 계속됐다. 주변 사람들의 의식이 변하지 않아 힘든 점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권씨는 형들의 가부장적인 의식을 바꾸는 데 10년이 걸렸단다.

“우리 집은 제사를 지내는 데 10년 전만 해도 집에 가면 형수들이랑 아내는 음식 만든다고 부엌에서 일만 하고 형들은 누워서 TV를 봤어요. 예전에 우리 형은 바로 코 앞에 있는 재떨이도 부엌에 있는 형수를 불러서 가져오라고 시키더라고요.” 집안 분위기를 바꾸려고 아내와 눈 사인을 주고 받기를 몇 십번. “그날도 젯상을 준비하는 자리였어요. 부엌에서 까던 밤이 잔뜩 든 그릇을 가지고 나왔죠. 하릴없이 TV 보는 형들에게 가서 ‘우리도 이거나 좀 깎으면서 보자’고 슬적 말했더니 다들 펄펄 뛰더라고요. 하려면 너나 혼자 하라고. 그런데 지금은 우여곡절 끝에 식구가 다 같이 상을 차리는 분위기죠.” 시간을 두고 꾸준히 설득하는 작전이 주효했다.

형들이 변화에서 자신을 얻은 그는 경험을 친구들 모임으로 밀고 갔다. “으레 그렇듯 남자들은 술 마시고 여자들은 상 차리고 팀絹?보는 분위기였는데, 남자들 사이에서 ‘왕따’를 몇 년간 당하면서까지 분위기를 바꿔 놨죠. 아내의 공이 컸어요. 자꾸 그런 부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타협하면서 차츰 주변 사람들까지 변하게 만들었으니까요.”

올튼씨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며 맞장구쳤다. “여자 친구한테 잘 하면 ‘사내 자식이 뭐 그러냐’는 말을 우리 세대도 많이 해요. 친구들끼리도 남자들한테 그런 말 듣기 싫으니까 일부러 사람들 앞에서는 여자 친구한테 다르게 대하는 아이들도 있죠. 많이 변하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도 남성적인 것에 대한 고정 관념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 한 부분이 많아요. 내가 깬 의식을 가지고 있어도 사람들이 손가락질 하면 기분이 썩 좋지 않아 지는, 뭐 그런거죠.” 그렇다면 문제는 현실적 전략이다. 이런 현실에서 평등 문화를 가꿔 나가기 위해 우리가 어떻게 노력해야 할까?

“부부간에도 서로에게 너무 의존적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 같아요. 서로의 소중함도 크게 느끼게 되고 자연스럽게 인간 대 인간으로 평등해 질 수 있는 분위기가 만들어지는 것 같습니다. 우리 같은 모임을 통해 간접 체험을 하는 것도 도움이 많이 되는 것 같고요.” 한 회장의 말이다. 그 실례로 그는 대학가에서는 늘고 있는 여성 세미나, 성폭력 신고 창구의 운영 등 현재 일고 있는 평등 문화 만들기 노력을 전했다. 올튼씨도 “일상 생활에서도 강압적으로 여자들에게 술을 먹인다거나 싫은 사람과의 ‘러브 샷’이나 입에서 입으로 과자를 전달하는 ‘빼빼로’, ‘키스 게임’ 등 은근히 스킨 쉽을 요구하는 남성중심적 놀이 문화도 점차 사라지고 있는 추세입니다. 이런 생화 속의 작은 변화들이 조금씩 우리의 의식을 깨게 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저는 아내와 끊임없이 대화를 많이 했어요. 의식의 변화란 하루 아침에 이뤄지지는 않지요. 서로를 이해하는 데 4~5년이 걸렸어요. 가족 회의도 많은 도움이 됐지요. 일 주일에 한 번씩 갖는 가족 회의는 자유 토론장이죠. 부모라고 권위를 내세울 수도 없다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권위가 엄청 무너지는 자리죠. 아주 무서운 날이에요. 하하. 하지만 서로 평등한 관계에서 식구들이 불만을 얘기하고 서로 받아들이고 고쳐 나가는 것이 지속되다 보니 관계망이 튼튼해져요. 한 번에 변하기를 기대하지 말고 꾸준히 노력하다 보면 평등 문화로 조금씩 바뀌는 것 같습니다.” 권오광씨의 경험적 제안이다.

그들은 “한국 남자들의 평균 평등 문화 지수는 아직도 100점 만점에 50점 이하이고, 우리도 간신히 1점을 넘을까 말까 한다”고 입모았다. 그러나 그런 그들에게서 희망은 분명 싹트고 있었다. 이 모임은 10주년 기념해 ‘평등 학교 - E(Eequalityㆍ평등) 남자가 사는 법’이란 주제로 27일과 6월 1일, 3일, 8일 오후7시 서울 중구 정동 배제대 학술지원센터 1층 세미나실에서 20대 남성의 성과 사랑, 연애방법 등 각종 세미나를 개최한다. (02)2272-2161

조윤정기자 yjcho@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