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에게 손가락 마비는 사형선고나 다름없다. 좌절감이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첫 내한공연을 앞둔 미국의 거장 레온 플라이셔(76)는 35년 간 오른손 마비를 앓았다.
한 창 왕성하게 활동하던 37세 때, 피아노를 칠 때마다 오른손 넷째, 다섯째 손가락이 오그라드는 증상이 나타났다. 근육긴장이상증(dystonia). 신경 계통의 이상에 의한 이 병은 정확한 원인이 밝혀지지 않았고 정확한 치료법도 없다.
그러나 그는 무너지지 않았다. 왼손만으로 연주를 계속하면서 지휘를 시작했고 음악 이론가이자 최고의 피아노 교수로 거듭났다. 간간이 양손 연주도 했지만, 증세가 호전될 때만 가능한 일이었다. 불굴의 의지 덕분일까. 기적이 일어났다. 보톡스 주사로 오른손의 감각을 되찾은 것이다. 보톡스는 주름살 제거술로 잘 알려져 있지만, 근육 수축을 막는 데도 도움이 된다고 한다.
이번 내한공연은 양손 피아니스트로 돌아온 플라이셔를 만나는 자리다. 독주(서울. 6월 1일), 울산시향 협연(울산, 27일), 아내이자 오른손 파트너인 캐서린 제이콥슨과의 피아노 듀오(부산, 28일)로 세 차례 관객을 만난다. 24일 서울의 한 악기점 피아노 연습실에서 만난 그는 오른손이 완전히 회복된 건 아니라고 했다.
“6개월마다 보톡스 주사를 맞고 있죠. 이 주사는 독성이 있어서 많이 맞으면 근육이 약해져요. 완치된 게 아니어서 칠 수 있는 곡도 제한적입니다. 코드가 많은 음악은 괜찮지만, 스케일이 많은 곡은 어려워요. 브람스는 독주ㆍ협주ㆍ실내악 다 많이 하는 편이구요. 하지만 독주곡은 아무래도 조심해서 고르게 됩니다.”
처음 손가락 이상을 발견했을 때 심정이 어떠했을까.
“처음 2년은 지독하게 절망했지요. 그런데 어느날 아침 눈을 뜨는 순간, 피아노 양손 연주가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부터 더 진지하게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죠. 피아노를 쳐서 보여줄 수 없어서 말로만 설명해야 하니까 더 정확하게 전달해야 했고 그러다보니 전보다 더 좋은 선생님이 될 수 있었죠. 지휘를 시작하는 계기도 됐구요. 거기서 큰 만족을 얻었습니다. 피아노 치는 건 아주 외로운 일인 반면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면서 함께 음악을 만들어가는 기쁨은 정말 대단해요. 병과 싸우면서 인간으로서 많이 배웠지요.”
오른손을 못쓰니까 왼손을 위한 피아노 레퍼토리를 많이 찾아내고 늘렸다. “왼손 레퍼토리가 생각보다 많더군요. 협주곡만 해도 20~30개는 되니까요. 또 많은 작곡가들이 저를 위해 곡을 써줬어요. 저로 인해 왼손 레퍼토리가 늘어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이번 서울 독주회 프로그램 중 레온 커쉬너의 ‘왼손을 위하여’(1995)나 조지 펄의 ‘왼손을 위한 연주곡’(1998)이 그래요. 더러 작곡을 위촉하기도 했구요. 아, 바흐나 브람스의 곡은 제가 위촉한 건 아닙니다만. 하하.”
지난해 12월 그는 베를린에서 힌데미트의 왼손을 위한 협주곡(1923)을 세계 초연했다. 3년 전 작곡가의 부인이 죽었을 때 악보가 발견돼 유족들이 그에게 초연을 부탁했다.
“연주시간 17분의 4악장으로 된 곡인데, 정말 좋은 작품이에요. 느린 악장이 특히 아름답죠. 1차대전에 참전했다 오른팔을 잃은 왼손 피아니스트 파울 비트겐슈타인을 위해 씌어진 곡입니다. 그의 위촉으로 라벨, 프로코피에프, R. 슈트라우스 등 여러 작곡가가 왼손협주곡을 썼는데, 힌데미트도 그 중 한 명입니다. ”
오른손 마비라는 큰 고통을 겪은 만큼 그는 피아노를 치는 학생들에게 몸을 혹사하지 말 것을 강조했다.
“젊을 때는 두려움이 없어서 죽어라고 연습만 하잖아요? 하지만 근육긴장이상증은 미국 내 환자가 약 30만 명, 그 중 악기 연주자도 1만 명쯤 됩니다. 시카고 심포니의 오보에 수석도 지난해 여름 이 병으로 사임했어요. 야구나 축구 선수를 보세요. 경기 시작 1시간 전부터 스트레칭 하면서 몸을 풀죠. 그런데 피아니스트에게는 그저 열심히 연습하라고만 하지 아무도 그런 주문을 안 해요. 손가락 근육은 아주 작고 약해서 스스로 잘 돌봐야 합니다.”
오미환기자 mhoh@hk.co.kr
■ 레온 플라이셔 공연 메모
▲독주회 6월 1일 오후 8시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울산시향 협연 5월 27일 울산문화예술회관. 지휘 이대욱. 모차르트 '3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 F장조', 라벨 '왼손을 위한 협주곡' 등.
▲플라이셔 & 제이콥슨 듀오 5월 28일 부산문화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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