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퐁 뇌프의 연인들’에서 여 주인공에게 반한 남자는 그녀의 가방에 이런 쪽지를 남긴다. “네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내일 하늘이 하얗다고 말해줘. 그게 나라면, 나도 너를 사랑한다면 구름은 검다고 답할게.”
다음날, 남자는 여자의 입에서 ‘하늘’ 이야기가 나오기만을 기다리지만 여자는 좀처럼 하얀 하늘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그러던 가운데 여자가 툭 내뱉는 “하늘이 하얗다”는 마치 내가 그녀의 상대역인양 벅차게 만드는 대사. 남자는 기다렸다는 듯이 “구름은 검어”로 답하고, 기약 없던 계약서에 마침내 도장이라도 찍은 양 둘은 사랑을 시작한다. 영화의 내용을 모른다면 하늘이 하얗고 구름은 검다는 대사들이 연인의 감정을 서로 확인하는 밀어라고 감히 짐작할 수도 없을 것이다.
‘사랑’이나 ‘설레임’, ‘관심’ 등의 단어들이 한 개도 쓰이지 않고 남녀가 마음을 나눌 수 있었던 이 선문답 같은 대사들만 떼어서 본다면 말이다. ‘사랑’이라고 흔히 말하는, 형체 없는 그 무엇을 인간이 정해놓은 몇 단어로 밖에는 표현 할 길이 없어 보이지만 꼭 그렇지 만도 않다는 얘기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진실로 정(情)이 통(通)하다 보면 어느새 둘만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가 만들어 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 매운 닭 찜; “나 스트레스 쌓였어"
내 오랜 남자 친구와 나는 직장이 가까운 관계로 하루 두 세끼를 함께 먹는다. 식비를 아낀다는 미명 하에 언제부터인지 단둘이 먹는 끼니 수가 늘어난 것. 그러다 보니 상대가 원하는 메뉴만 들어도 상대방의 심기를 짐작 할 수 있게 되었다.
예를 들어 ‘매운 맛’을 찾는 다면 엄청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증거. 특히 내 경우는,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오래 걷거나 격한 운동을 하며 해소하는 타입이기에 유난히 더 매운 맛을 찾는다. 업무 중 ‘열 받는’ 일이 생기면, 그때마다 만사 제치고 운동을 할 수 없는 일이니 대신에 혈액 순환을 빠르게 하는 매운 맛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그 이의 회사 앞 분식집에서 먹는 ‘폭탄 비빔 냉면’이나 불 닭, “맵게 무쳐 주세요”라는 주문이 붙는 쭈꾸미 숯불구이를 먹자 한다면 “나 오늘 진짜 스트레스 쌓였어”라고 말하고 있는 거다.
사진가와 진행 기자를 비롯하여 대 여섯 명의 스태프들과 일정이 빠듯한 화보 촬영을 하는 날에는 요리사인 내가 따로 준비하는 메뉴가 있다. ‘매운 닭 찜’인데, 청양 고추와 고운 고춧가루를 듬뿍 넣고 닭을 볶다가 물 붓고 자작하게 졸여서 만드는 맛이다. 여섯 시간이상 배를 굶어가며 화보를 만들다보면 푸드 스타일링을 담당하는 나도, 사진가의 보조를 맡는 조수도 다 지치고 열 받기 마련. 그런 촬영이 한 바탕 마무리 된 다음 천천히 졸여진 매운 닭을 턱 내어 놓으면 모두가 행복해진다. 나라의 경제가 불안정하고 국민들의 삶이 편치 않을 때 매운 음식 사업이 호황을 누리는 것과 같은 이치겠다.
◆ 인도식 사프란 밥; “변화가 필요해”
매운 맛 말고도 우리 커플의 말을 대신하는 메뉴는 아직 많다.
“생(生) 흑맥주 마시고 싶어”는 이태원, “간재미 회랑 소주 어때?”는 서해 바다로 가자는 뜻이다. 반대로 “대관령 생각나”는 “양고기 먹고 싶어”, “프랑스 영화를 볼까?”는 “와인 마시자”는 뜻으로 지명이나 추억의 장소가 메뉴를 대신할 때도 있지만. 오늘 입맛이 없다고 말하면 상대에게 불만이 생겼다는 말이고, 정거장에서 만나 노점 떡볶이로 때우자 하면 일정이 바쁘다는 뜻으로 우리는 알아듣는다. 이러다가 “인도 요리 먹자”라고 말을 하면 일상이 지루하다는 뜻이다.
이국적인 향신료가 감각을 깨워주는 인도 요리는 입안을, 일상을 새롭게 해 주니 기분전환에 특효다. 다진 고기에 향료를 섞어 튀긴 사모사는 맥주를 곁들인 스낵으로, 다진 토마토, 초절임한 오이나 양파가 곁들여?탄두리 고기는 독한 무화과 술과 어울린 특식으로 반갑다. 사프란 꽃술을 모아서 만든 향신료 ‘사프란’은 실고추처럼 생긴 모양과는 달리 고가의 식재료다. 이걸 밥물에 몇 가닥 띄우면 노란 밥이 지어 지는데, 그 향미가 독특해서 찬이 필요 없는 맛이 난다.
내일이면 부부가 되는 오랜 연인들도 노란 밥을 사이에 두고 숟가락 부딪치면 다시 설레어진다. 사프란 향기에 취한 내 눈이 매일 곁에 있는 그와 그녀를 다시 보게 되니까.
삼겹살 먹자고 하는 날에는 힘에 부치는 일이 있는 것이고, 버거 세트를 나눠 먹자는 날은 데이트 자금이 넉넉지 못 한 것이다. 말이라는 것이 한정된 뜻만을 전달하는 수단이기에 마음을 덜 보일 수도, 잘 못 보일 수도 있다. 이럴 때 둘 만이 소통 가능 한 언어가 따로 있다면 오지에서 자국민을 만난 듯한 반가움으로 매일을 살 수 있지 않을까.
▲ 매운 찜 닭
닭 1마리, 홍피망 1개, 청양고추 2개, 양파 1/2개, 파 약간, 감자 1/2개, 당근 약간, 고춧가루 1큰 술 반, 다진 마늘 1작은 술, 두반장 1/2~1큰술, 올리고당 약간.
1. 닭은 깨끗이 손질하고 모든 야채는 한입 크기로 썬다.
2. 냄비에 기름을 두르고 다진 마늘을 볶다가 1의 야채와 닭, 고춧가루를 넣고 볶는다.
3. 2에 두반장을 넣고 한번 더 볶은 다음 물을 자작하게 붓고 끓인다.
4. 3이 한소끔 끓으면 불을 낮추고 졸인다.
5. 4의 닭이 완전히 익으면 여분의 두반장이나 올리고당과 후추 등으로 간을 맞춘다.
**불린 당면을 넣어도 좋다**
▲ 사프란 밥
사프란, 쌀 1컵
1. 씻은 쌀을 솥에 담고 물을 잡은 다음 사프란을 넣는다.
2. 1을 불에 올려 밥을 짓는다.
3. 딜이나 타임과 같은 허브를 곁들인다.
** 푸드 채널 ‘레드 쿡 다이어리’ 진행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