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욱씨는 5ㆍ16 핵심인 김종필씨 등과 같은 육사 8기 출신으로 중령 때 가담한 쿠데타가 성공한 뒤 불과 2년 만인 1963년 7월 중앙정보부장이 됐다. 이후 3선 개헌을 주도하는 등 박정희 정권의 정치공작을 도맡았으나 69년 10월 전격 해임되면서 박 대통령과 멀어졌다. 김씨는 유신 직후인 73년 3월 유정회 국회의원 명단에도 빠지자 한 달 뒤 미국으로 망명, 반 정부 활동을 벌였다.
김씨는 박동선씨를 통한 박 정권의 미 의회 로비의혹을 조사하던 미 하원 프레이저 청문회에 출석해 박 대통령의 비리를 폭로했다그러나 청문회의 조사결과 김씨 본인도 1,500만~2,000만 달러를 치부해 해외로 빼돌린 뒤 고급주택에 거주하면서 자녀들에게 벤츠 승용차를 사주고 카지노에 빠져 한 번에 수 만 달러를 탕진하는 등 방탕하게 생활한 것으로 드러났다.
한편 김씨의 폭로로 치부가 드러날 것을 두려워 한 박 대통령은 정일권, 김종필, 김동조, 오치성씨 등 측근들을 밀사로 보내 귀국을 종용하고 돈으로 회유했으나 번번히 실패했다.
김씨는 박 정권의 비사를 담은 회고록을 쓴다고 공언, 이에 놀란 박 대통령이 78년 12월 보낸 윤일균 중정 해외담당차장으로부터 50만 달러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김씨는 79년 4월 회고록을 출간했다.
김씨는 해외재산도피, 회고록 출간, 반한 활동 등으로 박 대통령의 배신감이 극에 달했던 그 해 10월1일 파리로 갔다. 그 목적에 대해선 국내 연예인과의 밀회설 등 추측이 분분하다.
김씨는 파리에 도착한 지 일주일 뒤인 7일 저녁 시내의 한 도박장에서 마지막으로 목격된 뒤 실종됐다. 당시 박 대통령이 김씨에 대한 회유가 실패하자 중정을 통해 살해했다는 소문이 파다했으나 구체적 경위는 지금까지 미스터리로 남아있었다.
이동국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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