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 전 오늘 밤 전남도청에 남기로 결정한 사람들이 철의 심장을 지닌 영웅들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 밤의 생존자 한 사람은 최근 텔레비전 인터뷰에서 그 때의 심정을 “공포라는 게 무엇인지 처음 알았다.
머릿속이 하얗게 말라 아무런 생각도 없었다”고 회고했다. 그 밤에 그 곳에 남아있던 사람들은, 거기 없었던 사람들처럼, 죽음을 두려워했다. 단 한 번뿐인 삶에 대한 애착이 그들에게도 있었다.
학살 이후 사반세기 동안 5월광주는 분명히 진화했다. 그 때 그 일은 6공화국 들어 ‘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오피셜 스토리’에 편입됐고, 이후 해마다 5월이면 언론은 광주 관련 기사를 의례적으로 쏟아냈다.
김영삼 정부부터 치자면 우리는 광주항쟁의 역사적 정당성을 기꺼이 인정하는 세 번째 정부 아래 살고 있고, 항쟁 관련자들은 민주화운동 유공자가 되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취임 이래 해마다 광주 5ㆍ18묘역을 참배하고 있다.
그러면 5월광주는 복권되었는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정직한 일일 것이다. 언론은 올해 5월에도 발포 명령을 누가 내렸는지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며 호들갑을 떨었지만, 학살의 최종 책임자가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은 대한민국에 없다. 그 학살자는 지금 평안하게, 호사스럽게 여생을 보내고 있다.
그 점과 관련해서 김대중씨의 책임을 누락시키는 것은 부정직한 일일 것이다. 1997년 12월 대통령에 당선되고 나서 그가 맨 처음 한 일은 사면권자인 김영삼씨로 하여금 학살자를 사면하도록 한 것이었다.
그것은 이중으로 부당한 일이었다. 학살 피해자들이 김대중씨에게 학살자를 용서할 권한을 준 적이 없다는 점에서 부당했을 뿐 아니라, 학살자가 제 잘못을 한 번도 인정한 적이 없다는 점에서 부당했다.
사면의 최소한의 전제는 범죄자의 뉘우침, 이른바 개전의 정이다. 그러나 1980년 5월의 인간 도살자는 뉘우침의 시늉조차 행한 적이 없다. 김대중씨는 분수 넘치는 짓으로, 차츰 아물 수도 있었을 역사의 상처를 덧냈다.
그런 한편, 김대중씨의 그런 분수 넘치는 행위에 이해할 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가 단지 자신의 너그러움을 과시하기 위해 학살자를 사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도 사면의 명분으로 이른바 국민화합이라는 것을 내세웠다.
그 국민화합이란 학살자에게 분노하는 국민과 그렇지 않은 국민, 곧 학살자를 지지하거나 적어도 동정하는 국민 사이의 화합일 것이다. 김대중씨는 결국 학살자 편에 선 여론의 압력을 사면으로 수렴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사태의 핵심이다. 학살자가 권력을 움켜쥐고 있던 시절은 말할 것도 없지만, 그가 잠시 감옥에 갇혀있던 시절에도 그의 편에 선 사람들은 있었고, 자유를 얻어 ‘전직’의 거드름을 한껏 피우고 있는 요즘도 그의 편에 선 사람들이 여전히 있다. 있는 정도가 아니라 많다. 학살자와 인연이 닿아있는 정파는 여전히 넉넉한 지지를 받고 있다.
사실 학살자가 출감 이후 방자한 언사로 사법기관을 능멸할 수 있었던 것도, 무시하지 못할 정도의 여론이 제 편에 있다는 확신 때문이었을 것이다. 바로 그것이 5월광주가 복권됐다고 말할 수 없는 이유다.
해마다 5ㆍ18 기념행사를 한다고 해서, 그 기념행사에 주류 정치인들이 얼굴을 내민다고 해서 5월광주가 복권됐다고 할 수는 없다. 5월광주의 복권은 그 해의 민간인학살이 명백한 범죄라는 것을 여론의 다수가 기꺼이 인정할 때에야, 그래서 학살자와 그 동조자들이 여론으로부터 완전히 고립될 때에야 비로소 이루어질 것이다.
5월광주를 둘러싼 법적 싸움은 끝났지만, 정치적 문화적 싸움은 막 시작됐을 뿐이다. 이 싸움은 우리 사회 전반의 진보와 연동돼 있다. 그리고 젊은 세대의 탈정치화가 가속되는 추세를 볼 때, 이 싸움에서 시간이 학살자의 반대편에 서리라는 보장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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