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란한 봄꽃 축제는 철쭉으로 마무리된다. 이제 전국의 산은 초록 물결이다. 초록은 농도를 더해가면서 여름으로 치닫고 있다. 간과한 것이 있다. 발 아래 피는 야생화다. 순 우리말로는 들꽃. 얼마나 하찮은 대접을 받았으면 각기 제 이름을 가지고 있음에도, 들꽃이라는 대명사로 뭉뚱그려 불릴까. 하지만 엄연히 우리의 산하를 물들이는 귀한 존재이다. 3월말 눈 속을 비집고 핀다는 복수초가 개화하면서 시작된 들꽃의 피고 지기는 여름 절정기를 지나 9월까지 이어진다.
강원 태백의 분주령은 인제 곰배령과 함께 야생화 산행의 명소이다. 모두 생태계 보전 지역으로 지정된 곳이다. 지난 해 까지 양쪽 모두 산행이 가능했으나 올해 초 입산이 전면 통제됐다. 강원 양양을 비롯, 최근 몇 년 동안 강원 지역 산에서 발생한 산불의 상당수가 등산객이 버린 담뱃재 때문이라는 사실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다행히 분주령은 봄철 건조기가 지나면서 출입이 가능해졌다. 조심스레 발을 디딘 그 곳은 말 그대로 야생화 천국이었다.
산행은 태백과 정선의 경계에 위치한 두문동재(1,268m)에서 시작됐다. 흔히 싸리재와 혼용해서 불리고 있으나 이 곳에서 가까운 곳에 진짜 싸리재가 있으니 정확한 명칭이 아니라는 것이 주민들의 설명이다. 두문동재는 한강발원지인 검룡소를 품은 금대봉(1,418m)의 9부 능선에 위치하고 있다. 언덕까지 난 임도를 따라 가면 차량 20여대를 주차할 공간이 나온다. 임도 중간에 바리케이드를 넘어 본격적인 산행길로 접어 든다.
등산로에 접어서자 마자 들이 닥치는 붉은병꽃 물결이 벅차다. 노란 산괴불주머니와 양지꽃은 무리 지어 살고 있다. 바람에 맞춰 하느작하느작 흔들리는 꽃은 영락없는 춤꾼의 춤사위다. 산속으로 발을 들여 놓을수록 야생화 향연은 점입가경을 이룬다. 능선길을 따라 앞 다투어 피어있는 이스라지, 솜방망이, 딱총나무꽃 등이 단아한 자태를 뽐낸다.
쥐오줌풀의 냄새가 콧등을 자극하고, 자줏빛 벌깨덩굴이 혓바닥을 내밀고 나그네를 희롱한다. 자라다만 조릿대와 선괭이눈의 고만고만한 키재기 경연도 재미있다. 복수초에 이어 핀 너도바람꽃과 얼레지는 이제 내년을 기약하며 서서히 제 빛을 잃어가고 있다.
20분을 걸으니 눈앞에 금대봉 정상이 나타난다. 정상을 비켜 왼쪽으로 난 길을 택한다. 분주령(1,080m)으로 가는 길이다. 다시 10분을 걸으니 두 갈래길이다. 여기서 길을 잘못 택하면 분주령을 만날 수 없다. 시원하게 뻗은 능선 등산로에서 오른쪽으로 난 소로를 따라 가야 한다. 길을 잃지 말라는 뜻에서 등산객들이 매달아 놓은 리본을 유달리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이제부터는 하늘을 가린 숲 터널이다. 음지에서 피는 야생화가 지천으로 널려 있다. 회리바람꽃, 만주바람꽃, 꿩의바람꽃, 홀아비바람꽃 등 보기에는 서로 비슷 하지만 다른 바람꽃을 만난다. 조금 더 가니 이끼를 가득 머금은 고목나무샘이 눈에 띈다. 사람 2~3명 겨우 비집고 들어갈 수 있는 좁은 공간에서 나오는 샘물 앞에 ‘한강 발원지’라는 자그마한 팻말이 붙어있다. 국립 지리원이 공식 인정하는 한강 발원지 검룡소로 스며드는 물줄기다.
피나물, 족도리풀, 나래회나무, 노루산, 미나리냉이꽃 등 이름만 들어도 웃음이 나오는 꽃들을 구경하다 보니 어느새 분주령이다. 긴 터널을 지나 눈부신 푸른 하늘을 볼 수 있는 곳에 도착한 것이다.
분주령에서 검룡소로 내려가는 길 바닥에는 유독 부추가 많이 자란다. 분주령이라는 이름이 부추의 강원도 사투리에서 유래한 말이라는 가이드의 설명에 금세 고개가 끄덕여진다. 줄딸기, 두릅, 지느러미엉겅퀴, 까치박달나무를 벗삼아 하산하다 보면 검룡소와 만난다.
매일 2,000톤의 물이 솟아 난다는 곳이다. 한강의 발원지라는 상징성도 있지만, 용틀임 하듯 굽이치며 흐르는 샘의 모양이 그냥 보아도 예사롭지 않다. 이 샘은 500㎞길을 구절양장 이어지며 창죽천, 골지천, 동강, 여강, 남한강, 한강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다 서해에서 바다와 합류한다.
검룡소에서 하산하는 길에 펼쳐지는 솔숲 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제법 따습다. 여름이 멀지 않았음을 느낀다.
/분주령(태백)=글ㆍ사진 한창만기자 cmhan@hk.co.kr
■ 태백 함백산
태백은 높다. 워낙 고산 지대에 위치한 터라, 길과 관련된 많은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우선 국내에서 가장 높은 국도가 이 곳을 지난다. 분주령 산행의 시작점인 두문동재는 해발 1,268m로 38번 국도에 속한다. 지방도 중 가장 높은 도로는 만항재이다. 태백, 정선, 영월의 경계에 위치한 414번 지방 도로는 해발 1,330m.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기차역은 태백 추전역(855m)이다.
차로 갈 수 있는 가장 높은 길은 함백산 정상이다. 해발 1,573m이다. 국내에서 여섯 번째로 높은 산이지만 정상에 위치한 방송 송신탑까지 오르는 도로가 최근에 개통, 동네 뒷산보다 편하게 오를 수 있는 산이 돼 버렸다.
함백산은 태백의 진산(鎭山)이다. 태백산(1,567m)보다 더 높은 태백 제일봉이다. 일반인의 접근이 쉬워졌지만 등산객은 여전히 편한 길을 두고 두 다리로 산을 오른다. 분주령 못지 않게 많은 야생화를 보기 위함이다.
만항재에서 정선 정암사 방향으로 내려가다 보면 찻길 옆으로 등산로가 나 있다. 산행의 시작점이다. 경사가 완만한데다 정상까지 시야가 확 틔어 있어 산행에 어려움이 없다. 전국의 산하를 수놓았던 철쭉이 이제야 모습을 드러낸다. 조금 오르다 보면 시멘트 포장 도로와 마주친다. 함백산 정상까지 나 있는 도로이다. 이 길로 많은 사람들이 쉽게 정상을 오를 수 있게 됐지만 산행길에 만나는 도로는 왠지 어색하다. 등산의 재미를 반감시키는 요인이기도 하다. 차량으로 오를 때는 왜 느끼지 못했을까. 새삼 인간의 간사함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민들레, 양지꽃 등 야생화 군락을 음미하면서 1㎞가량을 오르면 어느새 정상이다. 동으로 태백 시내가, 서쪽으로는 정선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다. 북으로 북함백, 은대봉을 거쳐 분주령 산행 초입인 두문동재까지 이어지는 백두대간 능선도 눈에 들어온다. 쉬운 산행을 산은 너무도 장엄한 풍광으로 환영한다.
짧은 산행이 아쉽다면 백두대간을 따라 두문동재까지 간다. 대체로 내리막의 연속이라 힘들지 않다. 정상에서 내려서는 순간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다.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을 간다는 주목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백두대간의 산능선에서 바라 보는 신록이 싱그럽다. 초록 바다 위에 버티고 선 앙상한 가지가 묘한 대조를 이룬다.
3쉼터와 샘터가 있는 2쉼터와 1쉼터를 지나 은대봉으로 이르는 길은 초록 카펫 그 자체다. 마침내 도착한 은대봉(1,442m)에 서면 남한강의 발원지인 검룡소를 품은 금대봉을 절로 떠올린다. 함백산 아래 위치한 적멸보궁 정암사를 세울 때 조성된 금탑과 은탑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한 때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철도 터널이었던 정암터널(4,505m)이 이 아래를 지난다. 은대봉에서 1㎞를 다시 걸어 두문동재에 도착했다. 구름위의 산책은 그렇게 끝났다.
/함백산(태백)=글ㆍ사진 한창만기자 cmha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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