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 작가 오르한 파묵은 포럼 발제문 ‘교통, 종교 그리고 우리’에서 미국으로 상징되는 거대제국의 기만적 민족주의와 그에 대항하는 자생적 로컬 민족주의 대립과 아픔을, 이란의 수도 테헤란의 한 운전자의 고뇌에 빗대어 말하고 있다.
텅 빈 광장 로터리, 제 시간에 도착하려면 ‘실용적인 마인드’를 따라야겠지만, 세상엔 교통법규라는 것이 있다. 그 문제가 단순히 일탈과 합법의 이분법적ㆍ규범적 사고로 판단될 문제가 아님은, 운전자에게 ‘위법의식’의 배면에는 무의미한 형식에 대한 저항, ‘당신들’(서양)과 다른 ‘우리’라는 민족적 자부심도 깔려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독일인 생산자들조차 수리하지 못하는 고장 난 라디오를 주먹으로 쳐 작동시키는 것, 고장 난 전화기를 못 하나 박아 고치는 것”이 주는 그런 자부심이다.
운전자는 결국 법규를 어기고 가고자 하던 길로 접어든다. 그런 뒤 규칙을 어기는 것이 부여하는 희열과 함께 자신이 영리하다고 여긴다. “하지만 슬픈 것은 오직 집안에서 가족 혹은 친구들 사이에서만 규칙을 어길 수 잇는 테헤란 사람들처럼, 밖에서 거리에서 위반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교통 법규밖에 없다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서양인’이 되고자 하는 마음에 맞서, 여전히 “‘우리’로 남고자 하는 마음이 충돌하는 것이 터키의 문화를 표명하고 있다”고 작가는 적고 있다. 그 간극을 넓히고 심화하는 것이 미국의 과도하게 공격적인 군국주의 문화라면, 그에 저항하는 또 다른 민족주의, ‘우리주의’적 분노 역시 평화를 위협하는 요소라는 것이다. 그는 칸트적 의미에서의 ‘영구적 평화’를 꿈꾼다는 작가다.
-‘영구적 평화’라니, 너무 낭만적이지 않은가.
“물론 그렇다. 그것은 모든 전쟁의 가능성이 영구적으로 제거된 상태를 의미한다. 불가능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나는 세상의 모든 불화가 민족주의에서 발원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터키 내의 민족주의, 쿠르드 민족주의에 대해서도 항상 비판해왔다. 우리는 그 민족주의를 경계해야 한다.
-터키는 동ㆍ서양의 접점이자 이슬람과 기독교의 경계에 있는 국가다. 중동분쟁으로 상징되는 두 종교간 갈등에 대한 입장은.
“중동 분쟁이 종교적 충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미국에 대한 중동인들의 분노다. 미국은 그 지역 유전들을 통제하고 싶어한다. 종교는 다만 미국의 야욕에 이용된 것일 뿐이다. 나는 거기에 이용당하는 정치적 이슬람주의, 이슬람 근본주의에 대해 고민하고 그 민족주의에 분노한다.”
-터키는 정체성을 고민해야 하는 상황이지 않은가.
“접점이라는 의미는 동양도 서양도 아니라는 의미기도 하다. 나는 문화적으로는 보수주의자이며, 정치적으로는 서구적이고 사회주의적이다. 문제는 터키의 문화적 사안들이 정치적으로 해소된다는 사실, 가령 가로등조차 프랑스적인 감각으로 세울 것인가, 오스만 전통에 따를 것인가 하는 문제도 정치적인 판단에 따른다는 점이다. 부디 서양인이 되라, 동양인이 되라고 주문하지 말아달라. 또 서구화가 전통의 반대 개념은 아니다. 경제적 풍요와 정치적 민주화는 전통의 보호에도 꼭 필요하다. 나는 한국에 동양화의 전통, 서예의 전통이 살아있다는 것에 놀랐다. 우리에게 오스만제국 시절의 서예 전통, 시각예술의 전통은 사라지고 있다.”
(그는 1952년 태어났고, 이모부는 한국전쟁 참전용사다. 유년시절 한국전쟁 이야기를 통해 한국에 대해 친숙한 느낌을 지니고 있으며, 이번 방문을 통해 발전상에 깊은 인상을 얻었다는 말도 덧붙였다)
-당신의 작품 ‘내 이름은 빨강’도 그런 맥락으로 읽혔다.
“내 소설들은 터키 현실을 반영하지만 현실주의자는 아니다. 현실과 영혼의 상상력의 접합이기 때문이다. 나는 터키가 잃어가는 것들, 16세기 이슬람 세계의 시각예술을 재현하고 싶었다. 이슬람 세계의 전통적이고 고전적인 것들이 서구의 영향으로 어떻게 사라져갔는지 말하고 싶었다. 그 작품은 그림에 대한, 전통에 대한 열정을 지닌 사람들의 고뇌를 말한 작품이다.
최윤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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