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韓·中·日 공동 역사교재 쟁점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韓·中·日 공동 역사교재 쟁점

입력
2005.05.25 00:00
0 0

한ㆍ중ㆍ일 공동 역사교재 ‘미래를 여는 역사’ 편찬에 참여한 신주백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세 나라가 역사교과서의 틀을 이미 가지고 있는 점이 공동 교재를 만드는 데 적지 않은 걸림돌이었다”고 말했다.

한국과 중국 학자들은 메이지(明治) 유신 이후 일본의 동아시아 침략을 일관된 정책으로 파악한 데 비해, 일본 학자들은 청일전쟁 이후를 기점으로 보는 기본적인 인식의 차이도 있었다.

메이지 이후 일본의 동아시아 정책이 동아시아 관계를 새로 구성했다고 보는 일본 학자들은 일본의 동아시아 정책을 축으로 삼국관계를 파악하는 교재구성안을 냈지만 한국과 중국의 반대에 부딪쳐 현재와 같은 병렬형 서술이 됐다.

교과서관이 특히 달랐던 것은 중국이었다. 일본 학자들이 일본제국주의 국가는 침략자이지만, 일본 민중은 한편으로 피해자라는 점을 함께 서술해야 한다고 하자, 중국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반대했고, 한국이 일본의 견해에 동감을 표시하자 섭섭하달 정도였다고 한다.

신 연구원은 “중국의 교과서는 일본의 잔학 행위에 대한 서술이 적나라할 정도로 구체적인데다 전쟁을 정의의 전쟁과 불의의 전쟁으로 보는 이분법적 시각이 지배적”이라고 설명했다. 3ㆍ1운동이 중국의 5ㆍ4운동에 영향을 미쳤다는 내용도 중국의 반대로 실리지 않았다.

하지만 중국 학자들은 현재 중국 교과서에는 언급하지 않는 국민당의 항일투쟁 대목을 수용했다. 편찬위원회는 이번 작업을 통해 “각국의 역사연구나 역사교육 및 교과서의 차이로 개개 사건을 보는 관점이나 방식이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며 구체적인 계획을 잡지는 않았지만 후속 작업도 “충분한 대화와 토론, 연대를 통해 차이를 극복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밝혔다.

▲ 한중일 '미래를 여는 역사' vs 후소샤 '새로운 역사교과서'

한국 병합

1907년에는 통감이 행정권을 가지고 한국 내정을 처리하는 것을 명문화하고 각 부서 차관을 일본인으로 임명하게 하였습니다. 이어 한국 군대를 해산시키고 사법권과 경찰권마저 틀어쥐었습니다. 언론에 재갈을 물리고 집회와 결사의 자유도 빼앗았습니다.

구미 열강은…자국의 식민지 지배를 일본이 인정하는 대가로 일본의 한국 병합을 인정했다.…한국 병합 후에 설치된 조선총독부는 철도ㆍ관개시설을 정비하는 등의 개발을 하고 토지 조사를 개시하여 근대화에 노력했다.

식민지 정책

조선총독부는 갖가지 방법으로 창씨개명을 강요했습니다.…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약 20만 명이 넘는 한국 청년들이 조국이 아니라 일본을 위해 목숨 바쳐 싸워야 했습니다.…군 위안부 중에는 일본인 여성들도 있었지만, 대거 동원된 것은 한국 여성들이었습니다.…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간 각국 여성의 수는 최소 8만 명에서 최대 15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일본식 성명을 사용하게 하는 것을 인정하는 창씨개명이 행해지고 조선인을 일본인화하는 정책이 진행되었다. 전쟁 말기에는 징병이나 징용이 조선이나 대만에도 적용되어 다수의 조선인이 일본의 광산 등에서 가혹한 조건 아래 일하게 되었다.

중일 전쟁

일본은 베이징 교외의 루거우차오 사건을 일으켰습니다. 사건이 일어나자 일본은 중국군이 불법으로 사격했기 때문이라는 구실을 달아 일거에 화베이 일대를 점령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습니다.…상하이에서는 해군이 중심이 되어 8월13일에 전쟁을 일으키고…15일에는 중국의 수도 난징을 공습했습니다.

베이징 교외의 루거오차오에서 연습하고 있던 일본군을 향하여 누군가가 발포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다음날 아침에도 중국 측으로부터의 발포가 계속되어 전투 상태가 되었다.…같은 해 8월 외국의 권익이 집중되는 상하이에서 두 명의 일본이 장교가 사살되는 사건이 일어나 이것을 계기로 일ㆍ중 간의 충돌이 확대되었다.

대동아 공영권

구미 열강을 대신하는 일본의 지배를 치장하는 논리 대동아 공영권은 허울에 지나지 않았으며 전쟁 수행을 위한 자원, 자재, 노동력 조달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습니다.

일본의 남방 진출은 원래 일본의 자존자위를 위한 것이었지만 아시아 제국이 독립에 이르는 시계바늘을 빨리 돌리는 효과를 가져왔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