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의 공간을 벗어나 사이버공간으로 귀화, 거기서 새로운 문학의 아성을 구축해 온 하이퍼픽션(Hyper-Fiction)의 대가 로버트 쿠버와, 전통적인 글쓰기를 고수하며 아예 컴퓨터 자체를 모른다고 말하는 소설가 안정효씨가 만났다. 번역가이기도 한 안씨는 벌써 30여년 전에 쿠버의 소설 ‘하녀 볼기치기’ ‘공개 화형’ 등을 번역 출간하기도 했다.
안: 안녕하세요. 20년 전에 방한하셨을 때 뵙고 처음입니다. 그 사이 당신의 소설은 꽤 많은 변화가 있었던 듯 합니다. 우선 ‘하이퍼픽션’이라는 게 뭔지 설명 좀 해주시죠.
쿠버: 하이퍼픽션은 1960년대에 이미 시작된 흐름입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기존 소설이 책의 형태로 제작돼 주어진 줄거리를 따라가도록 만들어진 것 아닙니까. 하이퍼픽션은 인터넷을 이용해 그것을 깨뜨린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창문을 열면 하나의 이야기가 나오고, 거기서 너댓 가지의 다른 창문들로 연결돼 새로운 이야기들이 전개되는 식으로 끊임없이 가지를 치는 식이죠. 작가가 제시한 이야기만 따라가도록 만든 소설의 답답함을 벗어나자는 것입니다.
안: 말하자면, 일종의 탐험이군요. 등교 길에 곧장 학교로 갈 수도 있고, 중간에 오락실로 갈 수도 있고….
쿠버: 90년대 초에 나온 마이클 조이스의 소설 ‘Afternoon’을 본격적인 하이퍼픽션의 첫 작품입니다. 그 책에 대해 내가 뉴욕타임즈에 글을 썼더니 ‘The end of books’라는 제목을 달았더군요. ‘종이 책의 종말’ 이라는 얘기죠.
안: 어떤 형식인지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죠. ‘하녀 볼기치기’를 보면 한 장면을 두고 조금씩 진전되면서 계속 반복 표현되는데, 그것을 저는 ‘볼레로 기법’이라고 이름을 붙인 적이 있습니다만.
쿠버: 네, 적절한 표현입니다. 그것도 전통적인 서사 형식의 틀을 깨기 위해 제가 만든 100여 가지의 형식 가운데 하나입니다. 거기 보면 TV 편성표를 따라 줄거리가 진행되지 않습니까? TV 프로그램 자체가 소설의 줄거리인 셈이죠. 그 제목만 봐도 그걸 보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취향이 어떠한지 알게 되는 거죠. ‘생강빵으로 만든 집’(Genger-Bread House)에서는 수채화 기법을 썼어요. 여러 장면을 차근차근 꼼꼼히 묘사하는 게 아니라 툭툭 붓질하듯 수정도 가필도 없이 이어나가는 식이죠. 또 최근 써두고 아직 출판은 안한 ‘A Child Again’이라는 책은 동화기법을 썼는데, 마치 아이가 실제로 소설 속에서 게임을 하듯 그림 맞추기 게임도 넣고, 수수께끼 같은 것도 잔뜩 활용했어요.
안: 그 같은 형식 실험도 하이퍼픽션과 연관된 것이겠죠?
쿠버: 크게 보면 같은 맥락입니다. 본격 하이퍼픽션은 컴퓨터와의 결합을 통해 가능해집니다. 책이 아니라 컴퓨터를 활용하면, 텍스트에서 소리도 나고 그래픽도 뜨고 동영상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고정된 텍스트가 아니라 움직이는 텍스트인 셈이죠.
안: 당신의 작품 ‘제럴드의 파티’(Gerald’s Party)가 떠오르는군요. 제럴드라는 이의 집에서 벌인 파티 도중 각각의 방에서 연쇄 살인사건들이 일어나는 과정의 이야기인데, 거기 보면 비주얼 사운드가 많이 나와요. 이야기가 전개되다 느닷없이 사운드가 튀어나오죠. 그것은 마치 영화의 음향효과처럼 서사의 소리 배경에 해당되는 게 아닌가 싶더군요.
쿠버: 보통의 소설에서는 이야기 속 인물들이 그 같은 배경에 반응하는데, 제 책에서는 소설 인물들이 아닌 독자들이 반응을 합니다. 이게 저의 리얼리즘입니다. 저는 리얼리즘을 카프카에게서 배웠습니다. ‘변신’같은 작품을 봐도 사람이 갑자기 벌레가 된다는 설정은 황당무계하죠. 하지만 그것을 현실이라고 받아들이게 되면 이후의 전개 상황은 현실과 완벽하게 맞물려 빈 틈을 찾을 수 없습니다. 저는 한 편의 영화를 만들 듯 모든 장면들의 리얼리티에 세심하게 신경을 쓰면서 소설을 씁니다.
안: 그렇다면 내용은 어떻습니까. 내용면에서도 기존 소설과 차이가 있습니까.
쿠버: 전통적인 형식의 파괴는 금기까지는 아니더라도 전통과 관습에 대한 저항과 붕괴에 기여합니다. ‘신의 진리’(Devine Truth)라고 하는 미국사회의 종교적 경향들, 알게 모르게 강요되는 애국심 같은 것들이 그것이죠.
안: 당신의 ‘공개화형’이라는 작품에도 그 같은 메시지가 강한데, 같은 맥락이겠군요.
쿠버: 대표적인 경우죠. 우리가 전통적인 가치라고 생각하는 고정된 것들을 타파하고, 타파하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얽매이지는 말자는 것입니다. 가령 ‘악의 축’같은 개념은 근년에야 떠들썩하게 회자되지만 실은 꽤 오래 전부터 미국사회의 보편 정서의 하나로 팽배해 있었습니다. 저는 ‘계모’(Step Mother)라는 책을 쓴 적이 있는데, 거기에 저는 그림형제의 동화 240개를 압축해넣었어요. ‘계모’라는 키워드로 모든 이야기를 끌어 모아 한꺼번에 뒤집은 것입니다. 제 책의 계모는 복수의 대상으로 등장하는 악독한 계모가 아니라 착한 계모입니다.
안: 당신 작품에 묘사되는 장면들의 디테일 하나 하나를 뜯어보면 아주 섬세하고 치밀합니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해괴하고 공포스러운, 이를테면 고딕풍인데, 그 전체적인 분위기는 빅토리아 왕조 시대를 넘어 엘리자베스 시대의 문장처럼 느껴질 때도 있어요. 저도 작가로서 단어 하나 하나에 신경을 쓰는 일이 굉장히 고통스럽지 않느냐는 질문을 더러 받는데, 저는 그게 즐겁습니다.
쿠버: (웃으면서) 저도 그렇습니다. 저는 소설 기법들을 실험할 때마다 굉장히 즐거워요. ‘영화에서의 하룻밤’(A Night at the Movies) 같은 작품은 아예 영화 기법 자체를 주제로 삼은 작품입니다. 커팅기법, 디졸브 기법, 리플레이 기법 등을 신나게 실험한 소설이죠. 현실과 가상을 뒤섞고, 가상과 가상을 뒤섞고 뒤집기도 하죠.
안: 소설가들 가운데에는 자신을 위해 작품을 쓰는 사람이 있고, 독자를 위해 쓰는 사람이 있고, 둘 다를 위해 쓰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는 나 자신을 위해 많이 쓰는 편인데, 당신도 그런 것 같군요.
쿠버: 저는 독자에겐 별 관심이 없습니다. 제가 염두에 두는 독자가 있다면 단어 하나를 선택하기 위해 2시간을 들여 글을 쓰듯이, 그 단어 하나를 두고 2시간을 즐겨줄 그런 독자입니다. 편안히 즐기기 위해 책을 읽는 독자는 좋은 독자가 아닙니다.
안: 결국 하이퍼 픽션이란 문학과 테크놀러지가 만나 구축된, 낯설지만 막강한 세계인 듯 하군요. 그렇다면 당신이 일전에 썼다는 ‘종이 책의 종말’이라는 글처럼 ‘과거의 문학’은 희망이 없다고 보십니까.
쿠버: 그 ‘과거의 문학’이 위험에 처한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디지털 혁명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문학과 만났을 대는 엄청난 위력을 발휘합니다. 일단 독자와 작가가 만나는 속도가 빠릅니다. 또 양자가 밀착할 수 있고, 형식을 벗어나 자유분방한 만남이 가능합니다. 텍스트의 제작과 운송, 배포와 보관 등에 드는 비용이 저렴합니다. 과거의 문학이 무거웠다면 하이퍼픽션은 날렵합니다. 또 하이퍼픽션은 과거의 문학보다 더 큰 생동감과 자극을 선사합니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 문학의 발전입니다. 기술이 반드시 문학의 질과 배치되는 가치는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안: 당신이 몸 담고 있는 브라운대학이 하이퍼픽션의 선구적 공간이라고 듣고 있습니다. 몇 말씀 해주시죠.
쿠버: 우리는 60년대부터 하이퍼픽션에 대한 연구와 실험을 시작했고, 80년대 컴퓨터가 상용화하면서 정규 교육과정에 포함시켜 교육하기 시작했습니다. ‘동굴 프로그램’(Cave Program)은 영상 음향 텍스트 등과 관련한 모든 기술적 성과들을 집대성한 것인데, 그 ‘동굴’은 사방 벽과 아래 위가 모두 스크린으로 이뤄진 공간입니다. 특수 안경과 장갑을 끼고 그 가상현실의 공간에 들어가면 이야기를 각자가 창조할 수도 있죠. 우리는 또,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소설을 쓰는 작가를 돕는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며, ‘글쓰기의 자유’(Freedom to Write) 프로그램을 통해 권력으로부터 탄압 받는 중국 쿠바 소말리아 이란 콩고 등지의 작가들을 돕고 있습니다.
■ 로버트 쿠버(Robert Coover)는
1932년 미국 아이오와주에서 태어나 인디애나대학과 시카고대학을 졸업했다. 90년대 이후 문자와 음향 동영상 등을 결합하고 단일 텍스트 내에 다양한 서사구조를 담는, 이른 바 하이퍼 픽션(Hyper-Fiction)에 천착해왔다. 대표작으로 '공개 화형'(The Public Burning) 등이 있으며, 브라운대학에서 창작을 가르치고 있다.
■ 안정효 씨는
1941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강대 영문과를 졸업했다. 코리아타임즈 기자와 문화부장을 역임했다. '하얀 전쟁' '할리우드 키드의 생애' 등 장편소설을 냈고,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 등을 번역했다. 제1회 한국번역문학상(82년), 몬트리올 영화제 각본상(91년) 김유정문학상(92년) 등을 수상했다.
정리=최윤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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