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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 5·18은 진행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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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 5·18은 진행형이었다

입력
2005.05.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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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ㆍ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에 참여했다 삼청교육대에 끌려갔던 40대가 정신질환 등 후유증에도 불구하고 민주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한 처지를 비관, 스스로 목숨을 끊어 주위를 안타깝게 하고 있다.

23일 오전 2시께 광주 남구 월산동 자신의 아파트에서 투신, 25일 한 줌의 재로 변한 노모(48)씨. 1980년 5월 18일 고향인 전남 함평에서 조그만 당구장을 운영하며 신혼의 단꿈에 젖어 있던 그는 친구 이모씨와 함께 광주에 있는 형 집을 찾아가다 5ㆍ18민주화운동의 격랑에 휩쓸렸다. 버스를 타고 가던 그는 동구 대인동 광주소방서 앞길에서 다짜고짜로 계엄군에게 끌려가 진압봉 등으로 몰매를 맞았다.

머리가 찢어지는 부상을 입고 풀려나 함평으로 되돌아온 그는 당시의 상황을 알리러 다니기 시작했고, 영광에서 시민군을 모집한다는 얘기를 듣고 시민군에 지원했다. 19일에는 영광 지역에서 총기로 무장한 친구 등 6명과 함께 버스를 타고 광주행을 시도하다 계엄군의 저지를 당해 피신하기도 했다.

3개월 후인 8월 6일 그는 삼청교육대로 끌려갔다. 폭력 사건에 연루돼 함평경찰서에서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5ㆍ18 당시 무장 시민군으로 활동하다 경찰서에 총기를 반납한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그는 곧바로 ‘5ㆍ18 관련자’인 동시에 ‘불량배’로 분류됐고, 삼청교육대로 끌려가 2년8개월간 수용돼 지옥같은 생활을 감당했다. 폭력 혐의에 대해서는 그 해 12월 20일 기소유예 처분이 내려졌으나 삼청교육대 수용은 계속됐다.

삼청교육대를 나와 집으로 돌아왔지만 가정은 이미 풍비박산이 난 상태였다. 아내는 딸을 낳은 뒤 행방을 감췄고, 버려진 딸은 생후 6개월 만에 서울의 한 가정으로 이미 입양돼 있었다.

몇 년 뒤 그는 만신창이가 된 몸을 추스리고 재혼을 했지만 이후 해마다 5월이면 환영과 환청에 시달렸다. 정신병원을 제 집 드나들듯 했다. 피해보상을 받기 위해 1993년과 2000년, 2004년 3차례 5ㆍ18민주유공자 등록을 신청했지만 “증거가 불충분하며, 5ㆍ18과 직접적인 관련성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번번이 기각됐다.

유족들은 “그는 ‘나는 불량배도, 삼청교육대 피해자도 아니다. 5ㆍ18 시민군으로 활동했다는 이유로 삼청교육대에 끌려갔다. 때문에 5ㆍ18 유공자다’며 삼청교육대 피해자 보상신청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심지어 그는 3년 전 수소문 끝에 입양됐던 딸의 행방을 찾았으나 스스로 ‘5ㆍ18유공자로 지정되기 전까지는 아이를 만날 수 없다’며 재회를 거부해 왔다고 유족들은 전했다.

5ㆍ18 당시 노씨와 함께 광주로 가다 계엄군에 체포됐던 친구 이씨는 “그의 죽음은 탁상 행정이 부른 결과”라며 “행정기관이 서류심사에 그치지 않고 당시 상황 등에 대해 한번만이라도 실사를 했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라며 안타까워 했다.

광주=안경호 기자 kha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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