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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를 위한 글쓰기/ 볼프 비어만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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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를 위한 글쓰기/ 볼프 비어만 인터뷰

입력
2005.05.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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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제2회 서울국제문학포럼’에 참석한 세계 각국 문인들의 기자 회견이 연일 열리고 있는 세종문화회관 소연회실. 26일 6번째로 기자회견을 연 독일의 대표적 시인 볼프 비어만(Wolf Biermann)이 대뜸 기타를 치며 독일어로 번역한 김민기씨의 ‘아침이슬’을 불렀다. 자신의 시에 곡을 붙여 노래 부르기를 즐겨하는 음유시인다운 퍼포먼스였다. 동독 붕괴와 독일 통일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그는 “여러분들이 가야 할 이 길(통일)은 아주 힘들고 불편한 길이 될 것이다. 다리가 아플 것이다. 다리만 아픈 게 아니라 가슴도 머리도 아플 것이다. 그게 걱정이 되고 아픔으로 다가온다”고 했다.

_ 한국에게 통일 과정의 교훈을 들려준다면.

“비교하고 싶겠지만 충고 하기는 어렵다. 다른 민족의 경험에서 배울만한 가치가 있는 건 없다. 한국은 한국만의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그건 지금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힘든 길이 될 것이다. 실망하고, 사람들이 서로 더 싸우게 될지도 모른다. 남한 사람들은 통일을 이룩한 사람들을 욕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길을 가야 한다. 다른 길이 없기 때문이다. 프랑스 속담에 ‘사전에 경고를 받은 남자는 두 배 이상 강해진다’는 말이 있다. 나는 사전에 경고함으로써 여러분이 두배 이상 강해지길 바란다.”

_ 27일부터 김민기씨와 합동 콘서트를 하는데.

“2년 전 조그만 한국 분이 자기 노래가 담긴 CD를 들고 왔다. 누군가가 ‘이 사람하고 반드시 이야기하라’ ‘시와 노래를 쓰는 정말 중요한 사람’이라고 귀띔했다. 그가 김민기였다. 그가 알려준 ‘아침이슬’이 너무 아름답고 좋아 독일어로 번역했다. ‘나 이제 가노라’라며 한국인들이 가야 할 길을 제시하고 있다.”

_ 슬픈 가족사가 있는 걸로 알고 있다.

“나는 독일에서, 공산주의자이자 유태인 집안에 태어났다. 나치 치하에서는 극단적인 아웃사이더 가정이었다. 아버지는 1943년 아우슈비츠에서 세상을 떠났고, 나머지 가족도 유대인이란 이유로 모두 살해됐다. 나와 어머니만 살아 남았다. 어머니는 나를 ‘작은 공산주의자’로 키우셨다. 공산주의를 통해서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을 하길 원했다. 그 소망을 들어 드리고 싶었다. 그래서 16살이던 53년 동독에 갔다.”

_ 서독에서 태어나 스스로 동독으로 갔고 동독에서 반체제 인사로 낙인 찍혀 76년 추방되는 질곡의 세월을 보냈다.

“동독 훔볼트대에서 경제학을 공부하며 베를린 앙상블 극단의 조연출로 일했다. 나중에 의학, 수학을 공부했고 노동자 대학생이 함께하는 극단을 창설했다. 그러나 정권은 자신들을 공격하는 ‘대포’가 될 극단을 없애버렸다. 내가 시를 쓰고 노래할 수밖에 없도록 나를 ‘두들겨 팬’ 것이다. 그 뒤 많은 저항시를 썼다. 동독에서 내 노래는 엄청난 속도로 퍼졌다. 손으로 시를 베끼고 녹음기로 녹음하는 아주 적극적인 양상이었다. 동독 지배자들에게는 최악의 경우였다. 그래서 나를 추방한 거다.”

_ 66년에 발표한 당신의 대표적 작품으로 노래로도 널리 불린 시 ‘격려’에 대해.

“나처럼 정권에 의해 탄압을 받는 시인 친구를 위해 썼다. ‘이 모진 시대에/그대, 굳어지지 말라/다들 너무나도 굳은 사람들, 그들을 깨드려/다들 너무나도 뾰족한, 그들을 찔러/즉각 부숴버려라’가 시의 첫째 연이다. ‘괜찮아 세상이 좋아질 거라’고 격려하는 대신 경직된 사회에서 살고 있다는 걸 있는 그대로 이야기했다. 동독 감옥에 갇힌 수용자들에게도 가장 인기 있는 노래였다. 자유에 굶주린 동독 사람들에게 이 노래는 영혼을 채워주는 한 조각의 빵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이 노래를 전파하다 체포되면 2~3년간 감옥에 가야 했다.”

_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친구 귄터 그라스와 최근 결별했다는데.

“우리의 친구관계는 끝났다. 나는 더 이상 전체주의적 정권이 북한에 존속해서는 안 된다고 믿고 있다. 남한도 보다 민주적으로 바뀔 필요가 있다고 본다. 바로 이 점에서 나는 그와 논쟁했다. 나는 내 생각이 옳다고 본다. 그와 달리 나는 양 체제를 수십 년간 살아본 경험이 있다.”

김대성 기자 lovelil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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