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극단은 지난해부터 해온 ‘대표 레퍼터리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이번에는 ‘산불’을 무대에 올린다. 남쪽의 비료가 북녘 동포의 밥상을 위해 먼길 떠나는 요즘, 과거 ‘반공극’으로 분류됐던 연극 ‘산불’은 다소 생뚱맞을 지도 모른다. 더구나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겨울, 소백산맥의 두메산골 이야기다.
그러나 연출을 맡은 극단 산울림 대표 임영웅(71)씨는 “전쟁이나 이데올로기가 개인을 어떻게 망가뜨리는가의 문제를 이만큼 사실적으로 잘 표출한 작품은 드물다”며 “볼수록 새로운 작품”이라고 말했다.
사실 임씨에게는 ‘해방 이후 사실주의 희곡의 최고봉’이라는 평을 받아 온 차범석씨의 희곡을 실로 오랜만에 다시 연출하게 됐다는 의미가 새롭다. 70년 국제 펜클럽 대회의 서울 유치를 기념, 연극계의 대표적 인물들이 모여 만든 ‘산불’의 연출자로 그가 나선 지 35년 만이다.
이념 갈등이라는 표면적 주제 아래 본능과 욕망의 대립이 얽혀 있는 이 작품에는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이 열려 있어 62년 국립극단이 초연(연출 이진순)한 이래 극단 ‘아리랑’을 비롯해 여러 대학 연극반이 인기 레퍼터리로 상연해 오던 터다.
권복순, 주진모 등 국립극단의 간판 배우들이 연기 대결을 펼치는 동안, 김재건 서희승 등 고참 배우들은 마을 영감으로 나와 감초 연기로 너스레를 떤다.
이 산골 마을에서 낙오돼 뜻하지 않게 마을 아낙들과 연분을 트게 되는 빨치산 ‘규복’을 맡은 주진모는 두 여인(점례, 사월) 사이를 오가며 도둑 사랑에 날 새는 줄 모르는 역을 맡았다.주씨는 “자기 것을 확실히 쥐고 배우의 특성을 살려 주는 연출”이라며 “배우들에 대한 주문이 거의 없다”고 말했다.
마을 노파역의 강부자 씨는 “분석과 세부 묘사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매우 섬세한 연출”이라며 “70대 노파역의 ‘오구’를 할 때와는 또 다른 모습을 보여 주겠다”고 다짐했다. 강씨는 64년 ‘만선’ 이후 국립극단과는 41년만의 작업이다.
점례 역의 곽명화, 귀덕 역의 양말복 등 규복을 사이에 두고 밤과 낮을 번갈아 갈등을 벌이는 마을 아낙으로 분한 젊은 여배우들은 말을 아끼는 연출자 임씨의 작업 방식이 신선하면서도 “정확한 주문만 해 매우 무섭다”고 했다.
이 연극은 남북 대결 구도가 아닌 폐쇄 공간 속 인간 군상이 펼치는 작태에 대한 보고서이기도 하다. 평론가 양승국 씨는 “이데올로기의 대립상이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여타 반공극의 한계를 초월하는 작품”이라며 “ 일상성의 발견, 끈질긴 인간 본성에 대한 성찰이 돋보인다”고 공연의 의미를 밝혔다.
빨치산에게 곡식을 더 이상 빼앗기지 않게는 됐지만, 국군이 마을을 점령한 뒤 또 다시 이데올로기 재판이 벌어질 것이며 주민들이 공포에 더는 대목은 이 시대 관객들에게 이념과 체제에 대해 성찰할 계기를 준다는 것이다.
5월28일~6월4일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월~금 오후 7시30분, 토 오후 4시.7시30분, 일 오후 4시 (02)2280-4115
장병욱 기자 a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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