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한국 작가들은 옹졸하기 짝이 없는 일상의 덫에 걸려 재담꾼의 시원성을 잃어버리고 그 대가로 독자들에게 외면 받고 있다. 그래서 죄다 ‘문학의 종말’을 말하고, 소설의 시대가 끝났다고들 왕왕거리지만 그래도 이야기는 여전히 힘이 세다. 칠레 출신 망명자이자 서구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작가인 루이스 세풀베다(56)의 존재야말로 그 이야기의 힘에 대한 증거이다.
그의 무기는 누구나 쉽게 알아 들을 수 있는, 쉽고 짧은 문장과 역사의 중심에서 밀려난 주변부의 인생들에 대한 정밀한 시선이다. 언뜻 보기에 둔중해 보이는 이 칼을 쥔 채 그는 삶의 본질이란 ‘맹수’와 맞선다. 1987년 출간이래 10개국어로 번역되며 수 백만 권이 팔렸던 ‘연애소설 읽는 노인’에서도 나치 독일 치하에서 사라진 63개의 금화를 차지하려는 자들의 음모를 그린 ‘귀향’에서도 그랬다.
“세계 44개국에 제 책이 번역돼 있는데 제 이야기가 그저 아름답거나 행복감을 전해주기 때문이 아니라 바탕에 윤리의식이 깔려 있어서 독자들에게 어필하는 게 아닌가라고 생각합니다.” ‘국제문학포럼’에 참가하기 위해 22일 처음 한국 땅을 밟은 루이스 세풀베다는 자신의 글들이 독자에게 사랑 받는 까닭을 그렇게 풀이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 직업은 작가 말고는 없어요. 소설의 첫 글자를 써서 마침표를 찍기까지 굉장히 즐거운 마음으로 씁니다. 그래서 쓰는 거지요.” 스무 살에 글쓰기를 시작해 30년 남짓 반독재 투쟁가, 유네스코 기자와 그린피스 활동가 등을 거치면서도 줄곧 소설가로 살아온 그는 ‘왜 문학을 하는가’에 두 가지 소명도 덧붙였다. “단순한 언어가 아닌, 제 조국인 ‘스페인어’를 사랑해서 쓰고,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씁니다. 이름 없는 이들에게 이름을 주고, 목 소리 없는 사람에게 목소리를 부여해 가면서 저의 문학을 일궈가는 거죠.”
루이스 세풀베다를 키운 건 중남미 문학의 전통이다. “제 젊은 세대에 한창 유행했던 마르케스 같은 작가의 작품을 탐독하며 글을 쓰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혔어요. 훌륭한 문학 선생님들이 있었던 거죠. 그래서 문학을 통해서 중남미적인 전통과 관습을 독자들에게 널리 알려야 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악랄한 독재자 피노체트’에게 살해당한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으로부터 들었다는 “작가가 될 소질이 보인다”는 예언도 힘이 됐다. “청년시절 아옌데 대통령의 개인 경호원으로 일했는데 그때부터 지금까지 ‘어떤 이유로든 독재는 정당화 될 수 없다’는 신념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소설을 통해 독재자, 환경파괴자, 제국주의적 침략을 일삼는 백인 등 ‘세상의 적’들을 때로는 응징하고 때로는 조롱한다. 또 시시각각 반대편에 있는 자유를 사랑하는 시민, 자연과 한 몸으로 살고 있는 아마존 밀림의 인디오 같은 이들의 삶을 복원한다. 그 출발점에는 ‘연애소설 읽는 노인’이었다.
‘연애소설 읽는 노인’은 풋사랑이란 뜻의 아마존 밀림 ‘엘 이딜리오’을 배경으로 자연의 수호자인 노인과 새끼와 짝을 사냥꾼에게 잃고 광포해진 살쾡이가 자연 파괴자들로 인해 원치 않은 대결을 그린 소설. 그는 피노체트 정권 아래서 저항하다 3년간 감옥에 다녀온 뒤 망명 기간 중 아마존 밀림을 7개월간 탐험한 체험을 바탕으로 이 소설을 썼다. “이 소설을 쓰기 전 10년이란 세월을 고민했어요. 혹시라도 아마존에 대해 아무런 생각도 갖지 않은 사람들에게 환상을 심어주는 초청장이 될까 굉장히 두려웠죠. 하지만 아마존을 지켜온 환경운동가 치코 멘데스가 암살을 당한 후 결심을 했어요.”
책이 출간 된 이후 그는 부와 명성을 모두 손에 쥐었다. 그러나 최근까지 자기 문학의 정체성에 대한 방황은 멈출 수 없었다. “내 문학의 방향성이 명확하지 않아서 고민이었어요. 그러나 얼마 전 프랑스의 한 대학교수로부터 ‘당신 책은 소외된 사람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내 문학이 지향해야 할 좌표가 비로소 명확해 졌습니다.”
김대성 기자 lovelil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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