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많고 탈 많았던 고려대의 이건희 삼성회장 명예박사 수여행사와 관련한 해프닝이 지난 주 총학생회 탄핵안 부결로 겨우 마무리됐다. 창학 100주년을 맞아 ‘세계의 고대’로 야심찬 웅비를 준비하던 학교로서는 적지않이 상처를 입었다.
시위 학생들은 ‘불행히도’ 대상을 잘못 골랐다. 최근에야 삼성의 거대한 힘에 대한 우려들이 조금씩 나오고 있지만 삼성이 의식주서부터 교육, 문화, 레저, 복지에 이르기까지 삶의 거의 전 영역을 아우르는 힘을 갖게 된 것은 꽤 오래 전부터다. 기업의 존재 목적인 이윤 창출에 남다른 능력을 발휘한 결과라고 보면 삼성을 크게 뭐라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문제는 사회 전체가 이 신흥파워에 너무 주눅들어 있다는 것이다. 물론 학생들의 시위는 문제가 있었다. 피케팅 정도였더라면 괜찮을 뻔 했다. 삼성에 대해 누구도 쉽게 딴지 걸지 못하는 현실에서 “역시 고대야” 하는 얘기도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사건에서 진짜 우울한 것은 제자들보다도 더 ‘오버’한 스승들의 모습이다. 총장이 이튿날 삼성 측에 보낸 사과문은 마치 석고대죄하는 듯한 느낌이다.
“이번 학위수여가 이 회장님의 거듭된 겸양에도 저희가 굳이 고집해 성사됐음을 생각할 때 이 회장님 가족과 내외빈께 죄송한 마음을 금할 길 없습니다. … 바른 교육을 통해 학생이 균형잡힌 시각과 절제된 행동양식을 갖추도록 가르치겠습니다.”
그리고 부총장과 처장급 보직교수 등 10명이 사퇴서를 제출했다. 총장은 또 굳이 삼성 고위임원의 특강장소까지 찾아갔다. “기념행사만 아니면 저도 사퇴하고 싶습니다.” 이 정도면 나가도 너무 나갔다.
5년 전 김영삼 전 대통령은 고려대 특강에 초청됐다가 학생 시위대에 의해 하루종일 차 안에 갇혀 소변까지 그 안에서 해결하는 수모를 겪었다. 그 때는 학교의 누구도 이런 얘기를 하지 않았다. 여러 모로 비교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지만 어쨌든 당시 김 전 대통령은 이미 죽은 권력이었고, 삼성은 시퍼렇게 살아있는 힘이어서 그랬을까?
학교를 더 우습게 만든 것은 이 회장의 너그러운 ‘처분’이었다.
“20대에 사회현실에 애정을 갖고 참여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고, 사회가 한단계 더 발전하기 위한 진통의 과정으로 볼 수 있는 것 아니냐. 큰 틀에서 대범하게 바라보자. 표현방식은 다소 과격해도 젊은 사람들의 열정으로 이해한다.”
총장과 보직교수들은 가슴을 쓸어내렸을지 모르지만 이 말이야말로 기실 교육자인 자신들이 제자들에게 했어야 할 말이었다. 삼성으로부터는 ‘면죄’됐을지 몰라도 사실은 이만저만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다.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 대학의 자본 종속이 심화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도 해도 그래도 대학은 정치권력이든, 경제적 힘이든 그의 하부구조로 전락해선 안 된다. 누가 뭐래도 대학의 존재이유는 다양한 학문과 가치를 실험하고, 현실에 대한 당당한 비판정신을 유지하는 데 있다.
우리 대학들은 저마다 ‘경영 마인드’를 최고가치로 선택하면서 대학 본연의 정신을 망각하고, 스스로를 경제의 종속가치로 묶어 버렸다. 사실 문제가 고려대에서 불거졌을 뿐이지, 수백억씩의 기부금을 이미 받았거나 줄서서 손 벌리고 있는 다른 대학들도 같은 상황에서의 처신이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고려대 총장은 재작년 취임 후 “학교 이름만 빼고 다 바꾸겠다”고 했다. 실제로 “세계 대학순위는 기부금 순위”라는 ‘철학’에 걸맞게 학교는 외형상 눈부시게 변화하고 있다.
그러나 대학이 끝내 지켜야 할 것은 이름만이 아니다. 대학의 지성적 권위와 학문적 자부심 또한 그 것이다. 더욱이 한세기 동안 우리 사회를 앞장서 이끌었고, 앞으로도 그 이상의 역할을 해낼 것이라는 기대를 받고 있는 명문 고려대임에랴.
이준희 문화부장 jun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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