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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석재 교수의 건축, 우리의 자화상] (10) 모델 하우스와 무늬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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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석재 교수의 건축, 우리의 자화상] (10) 모델 하우스와 무늬목

입력
2005.05.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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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화려한 모습으로 자태를 뽐내며 동네 곳곳에 불쑥 등장한 모델 하우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버린다. 등장하는 것이 순식간인 것만큼 사라지는 것도 전격적이다. 3주 만에 뚝딱 생겼다 3일이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하지만 후유증은 오래 남는다. 그 건물이 만들어놓은 잔상이 아직도 눈앞에 선하다. 워낙 현란한 모습으로 치장하고 호객을 했기 때문이다.

건설회사 입장에서는 성공한 셈이다. 이번 분양 건은 끝났지만 장사 하루 이틀 할 것도 아니고 이렇게 한 번 강하게 뇌리에 박아두면 다음 번 어느 곳에서건 또 만나게 되어있다. 이런 이유로 건설 회사들은 모델 하우스에 공을 많이 들인다. 가급적 눈길을 끌어 상품 선전을 잘해서 가깝게는 이번 분양이 몇 십 대 일은 되도록 해야 할 것이며 길게는 자사의 이미지를 오래도록 간직하게 해야 할 것이다.

모델 하우스에는 공통점이 있다. 외관은 서구 최신 양식을 모방하거나 아니면 밑도 끝도 없이 화려하게 치장한다. 이것이 왜 문제인가. 문제는 두 가지다. 모델 하우스 자체에만 국한시켜보면 서구 건축양식에 대한 심각한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건축 양식을 콜라나 햄버거 수입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오해하게 만든다. 모방 양식도 하나같이 화려하고 자극적인 것들이다. 개업식 날 미니스커트 입은 도우미들이 음악 크게 틀어놓고 풍선 날리며 춤추는 것에 어울리는 건축 현상이다.

그 속에 전시된 아파트 모델까지 생각하면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모델 하우스의 본래 목적은 실제 지어질 아파트를 있는 그대로 똑같이 지어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요즘 우리의 모델 하우스는 그렇지 않다. 그곳에는 여러 겹의 부풀리기가 숨어있다. 법에 걸릴만한 노골적인 일은 물론 안 한다. 그러나 예민하게 찾아낼 준비가 안 되어있는 일반인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속아 넘어갈 수밖에 없는 교묘한 허상이 숨어있다.

왜 그런가. 모델 하우스는 전면이 유리로 지어지는 경우가 많다. 실제 지어지는 아파트보다 실내가 밝다. 공간 크기도 다르다. 모델 하우스의 천장은 실제 아파트보다 높다. 이것은 공간을 밝고 시원하고 깨끗하고 위생적으로 보이게 한다. 내장도 잘 꾸며져 있다. 종종 모델 하우스에 꾸며놓은 내장과 실제 지어진 것이 달라서 속았다며 분쟁이 일어나곤 한다. 외관의 축제적 분위기는 관람객을 들뜨게 만들어 모델 하우스 실내에 들어오면서 실제보다 더 멋있게 느끼는 착각에 빠지게 한다.

모델 하우스에서 벌어지는 이런 일들은 모두 허상과 모사본(=시뮬라크룸, simulacrum)의 세계이다. 건물의 골격을 세우는 재료부터가 그렇다. 가건물이기 때문에 소품 만들듯 서구의 어려운 양식을 쉽게 흉내낼 수 있다. 겉은 화려하지만 베니어판을 오려붙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껍질만 흉내내는 모사본의 전형이다. 붕어 없는 붕어빵과 같다. 드라마나 연극의 세트처럼 허구의 세계를 담는 가짜 윤곽이다.

화려함이 심할수록 허풍도 심하다. 초록에 대한 허구적 차용은 특히 두드러진다. 실내에 나무 몇 그루 심는 건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실내를 온통 흰색으로 칠해 놓으면 초록의 효과는 제곱으로 늘어난다. 천장이 높고 전면 유리인데다가 햇빛도 잘 드니 초록의 효과는 다시 몇 제곱으로 늘어난다. 이렇게 만든 데다 풀 좀 몇 개 더 그려놓고 아파트 이름을 ‘푸르지오’라 붙이면 사람들은 정말로 푸른 줄 안다. 다시 이것을 모방한 ‘푸르지요’라는 짝퉁까지 생겨났다. 모사본을 모방한 두 번의 모사본까지 나오는 판이다.

모사본은 실내에 쓰이는 재료에서 더 심화된다. 요즘 가장 많이 쓰이는 재료는 무늬목이다. 말 그대로 ‘무늬만 나무’다. 무늬목이 흉내 내는 원본은 의외로 많다. 20여 가지는 족히 넘는다. 흑단, 제브라, 월넛, 버드아이, 매이플, 파덕, 스프러스, 미송, 홍송, 향나무, 체리, 비취, 오크, 만소니아, 오동 등등이다. 이외에도 많다. 수목원이나 농원에 있는 나무 이름이 아니다. 웬만한 동네 인테리어 수리 가게에 가면 견본과 함께 쉽게 접할 수 있는 가짜 나무, 무늬목들이다. 톱밥 정도를 조금 섞는다고는 하나 주재료는 화학제품이다.

생전 처음 들어본 나무들도 많다. 원본을 듣도 보도 못한 나무를 모사본으로 듣고 본다니 정말로 현대 문명은 사상가들의 지적대로 모사본의 세계인가 보다. 색을 달리하고 온갖 무늬를 넣어서 이런 나무다 저런 나무다 주장하니 그런 줄 알고 믿을 수밖에 도리가 없다. 진짜 원본이 그렇게 생겼는지 일일이 대조해보지 않는 이상 나무 공부를 화학제품을 보고 하는 꼴이다.

무늬목의 모사 효과는 모델 하우스와 세트로 작동한다. 베니어판으로 외국 최신 양식을 모방해서 가건물로 만든 모델 하우스에 들어가서 실제보다 과도하게 꾸며진 실내를 본다. 무늬목은 진짜 나무로 지은 것 같은 착각을 만들어낸다. 마지막은 광고가 담당한다. 자연이 허락했다는 둥, 자연이 지었다는 둥, 도저히 속을 것 같지 各?문구들이 난무한다. 억지 춘향도 이런 억지가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속는다. 경영학 책에는 마케팅 전략이라고 나와 있고 광고학 책에는 반복의 힘이라고 나와 있지만 현대판 세뇌교육에 다름 아니다. 실제보다 좋아 보이게 만들고 포장까지 그럴싸하게 해놓았으니 분양가를 올려도 별 문제가 없다. 사람들은 모사본을 원본인줄 알고 착각하며 환상에 속아 계약을 한다.

모델 하우스는 하루아침에 나온 게 아니다. 10년 이상의 내공을 쌓은 결과이다. 최근에 모델 하우스가 유난히 화려해지고 자극이 심해져 가는 현상에는 다 이유가 있다. 분양가 자율화 이후 아파트 판이 너무 커졌기 때문이다. 건설 회사들은 10여 년 전부터 평당 1,000만원 이상의 분양가를 받아낼 여러 전략들을 짜왔는데 모델 하우스를 통한 환상 만들기는 그 중에서도 핵심이다. 많은 경우 일류 건축가들에게 의뢰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건축가로서 할 짓이 못 된다.

요즘 웬만한 초고층 아파트 단지 하나 짓고 나면 수백억은 남겨야 병신 소리 안 듣는다. 수십억 정도 남기면 인건비도 못 건진 망한 사업으로 친다. 정상적으로 원가계산해서 양심 껏 분양가 뽑았다간 당장에 무능력한 것으로 찍히며 생매장 당한다. 모든 것이 부풀려져야 한다. 모사본의 세계는 이를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이다. 합법을 가장한 바가지 씌우기다. 호들갑을 떨며 좌판을 벌였다가 분양만 끝나면 철수하는 일회성 투기가 세상을 지배해버렸다.

모델 하우스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모사본의 세계는 지금 우리의 집 개념이 있는 그대로 반영된 결과다. 집은 쉽게 부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지어야 돈이 나오기 때문이다. 집의 미덕인 항구성은 사라졌다. 집은 또한 멋 부려서 과대포장 해야 한다. 역시 그래야 돈이 나오기 때문이다. 화장을 지우면 친엄마도 자기 딸을 못 알아보고, 방학을 한 번 보내고 나면 교수도 자기 학생을 못 알아보는 겉치레와 성형의 가치가 집 개념까지 지배하는 세상이 되었다.

더 궁극적으로는 원본을 갖지 못하는 현대 산업문명의 근본적 한계이다. 자연에서 분리되며 시작한 현대 산업문명은 스스로 원본이 되지 못하며 원본을 만들어내지도 못한다. 자연의 원본을 모방한 모사본을 만들어낼 뿐이며 다시 그런 모사본을 반복적으로 모방하는 순환고리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모든 것의 주기가 처음부터 짧게 잡혔고 점점 짧아져 가는 현대 산업문명의 원죄가 서서히 마지막 폐해를 드러내고 있는 형국이다. 물건을 더 팔아먹기 위해 일부러 약하게 만드는 못된 장사꾼 심보가 집에까지 파고들었다. 언제는 집이 썩어서 헐었던가.

이화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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