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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출 청소년 "백화점 시식코너서 배고픔 해결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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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출 청소년 "백화점 시식코너서 배고픔 해결해요"

입력
2005.05.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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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오 단단히 하세요.”

19일 오후 1시 서울 관악구 신림사거리. 가출경력 3년의 ‘베테랑’ 윤기찬(가명ㆍ16)군이 호기롭게 말하며 앞장을 섰다. 그는 시립 신림청소년쉼터가 마련한 ‘2005 탈출공감-거리체험’ 행사에 참여한 기자의 파트너. 성인 1명과 가출 청소년 1명이 짝이 돼 1박2일간 무일푼으로 숙식을 해결하며 거리생활을 체험하는 이번 행사는 가정해체로 인해 날로 증가하는 가출 청소년에 대한 사회적 배려를 촉구하기 위해 기획됐다.

기찬이가 가장 먼저 찾은 곳은 보라매공원이었다. “공원에는 간섭하는 사람도 없고 편하죠. 벤치에 누워 잘 수도 있고, 식수대랑 화장실도 있고…. 돈 없을 때 빈둥거리며 시간 보내기엔 최고예요.”

다섯 살 때 교통사고로 아버지를 잃은 기찬이는 두 해 뒤 새엄마가 전재산을 챙겨 줄행랑을 치면서 벼랑 끝으로 몰렸다. 친척집을 전전하다 초등학교 3학년 때 고아원에 갔지만 쇠파이프를 휘두르는 형들의 폭력에 못 이겨 3년 만에 뛰쳐나왔다. 이후 거리생활이 3년이 되면서 학교와도 영영 이별이었다.

오후 5시. 벤치에 누워 한 시간쯤 낮잠을 잔 기찬이는 인근 백화점으로 걸음을 옮겼다. 백화점을 순회하며 시식코너에서 한 끼 식사를 때우는 건 생존법칙 제1조. 잘게 잘라놓은 햄과 삼겹살, 불고기, 만두에다 종이컵에 담긴 냉면과 메밀국수까지…. 흘겨보는 종업원들의 눈초리를 외면하며 허겁지겁 배를 채우던 기찬이는 “오늘 밥은 이걸로 끝이니까 많이 먹어두세요”라고 충고했다.

오후 7시. 백화점을 나온 기찬이는 담배부터 꺼내 물더니 괜히 지나가는 행인에게 욕설을 내뱉었다. “가끔 아무나 패버리고 싶을 때가 있다”고 했다. 세상에 대한 울분이다. 얼마 전까진 아이들을 위협해 돈을 뺏는 ‘삥뜯기’를 하거나 친구들과 작당해 빈 택시를 터는 것이 일과였다. 지난해 10월엔 택시를 털다 붙잡혀 보호관찰 2년을 받았다. “웬만하면 나쁜 짓은 안 하려고 하는데 너무 힘들고 배고프면 어쩔 수가 없어요.”

게임방 몇 곳에 들러 구경을 하며 시간을 보낸 후 날이 어두워지자 잠자리를 찾아 다시 보라매 공원으로 돌아가 벤치에 누웠다. 온종일 걸은 탓에 발바닥은 온통 가시에 찔린 듯 따끔거리고 몸은 물에 젖은 솜뭉치처럼 천근만근이었다. 기찬이가 “힘들죠?”라고 놀리듯 물었다. 그에게도 거리생활이 재미없고 힘들기는 매한가지다. 기찬이는 그래도 고아원으로는 결코 돌아가지 않겠다고 했다. “힘들어도 여기 나와 있는 게 맘이 편하다”는 것이다.

자정을 넘기자 5월 밤의 한기가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오돌오돌 떨다가 좀 더 따뜻한 곳이 없는지 물었다. 기찬이는 “되게 칭얼거리네”라고 타박을 주며 인근 병원으로 안내했다. 문병 온 손님인 척 들어가 1층 대기실에 누워 잠을 청하는 수법이다. 딱딱한 의자에 누우니 몸이 부대껴 쉬이 잠이 오지 않았지만 뒷자리에선 이내 기찬이의 코 고는 소리가 들렸다.

오전 6시. “여기서 자면 어떡하냐’는 경비원의 고함소리에 부시시 일어나 쫓겨나듯 거리로 나섰다. 따스한 아침햇살과 싱그러운 바람을 맞으며 사람들이 하나 둘 집 밖으로 나서고 있었다. 그러나 기찬이에겐 먹거리와 잠자리를 찾아 헤매야 하는 고단한 일상의 시작일 뿐이었다.

박선영 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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