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해석학의 거두 佛 폴 리쾨르 별세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해석학의 거두 佛 폴 리쾨르 별세

입력
2005.05.22 00:00
0 0

“우리는 오늘 단순한 철학자 한 명 이상의 것을 잃었다. 모든 유럽과 철학계가 인본주의 전통의 가장 뛰어난 대변자의 죽음으로 비탄과 슬픔에 빠져 있다”(장 피에르 라파랭 프랑스 총리, 르몽드 인터뷰에서). “존경과 찬양을 고하기를 멈출 수 없다”(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 AFP 통신 인터뷰에서).

프랑스의 세계적인 철학자 폴 리쾨르의 죽음에 대한 조사는 끝없이 이어졌다. 아들 마르크씨는 20일(현지시간) “쉬테내 말라브리 자택에서 밤에 주무시다가 조용히 돌아가셨다”며 “가족과 친구 몇 분만 장례식에 참석토록 하라는 유언을 남기셨다”고 밝혔다. 향년 92세.

학계에서는 그를 20세기 들어 급격하게 발전한 인문과학의 성과를 종합해 해석학의 신 지평을 연 학자로 평가한다. 한스 게오르크 가다머는 이미 2002년에 별세했기 때문에 이제 독일과 프랑스의 해석학을 대표하는 양대 산맥은 끝났다.

특히 장 피아제, 미셸 푸코, 루이 알튀세, 레비 스트로스, 자크 데리다 등 1970년대 이후 30여년 간 세계 사상계를 풍미한 프랑스 철학계의 별들이 이제 리쾨르를 마지막으로 완전히 사라졌다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리쾨르는 발랑스의 개신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독일 철학자 에드문트 후설의 현상학을 연구해 인간과 신을 해명하려 했고 나중에는 텍스트 연구로 인간 존재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현실에 적극 개입하던 장 폴 사르트르와는 달리 지적 탐험에 몰두한 학자였지만 사회적으로도 모든 형태의 전체주의를 거부하며 나름대로 행동했다. 50년대 프랑스의 알제리 전쟁과 90년대 보스니아 내전을 비판했다.

그는 1차 대전 때 아버지를 잃었고, 2차 대전 때는 연합군으로 참전했다가 독일 포로수용소에서 5년간 고초를 겪기도 했다. 후설을 탐독한 것은 바로 이 때였다.

전후에는 소르본 대학과 낭테르 대학에서 강의했다. 특히 68년 좌파 학생운동이 불길처럼 타오를 때 낭테르 대학(현 파리10대학) 총장으로 있으면서 특유의 조정과 화해적 입장을 강조하는 바람에 ‘정부의 협력자’란 비난에 시달리며 미국으로 건너가 70년대 내내 시카고, 예일, 컬럼비아 대학 등에서 가르쳤다.

리쾨르는 작년 1월 르몽드와 인터뷰에서 “나는 행동하자고 외친다. 어울리는 적합한 행동을…. 세상에 대한 비전을 세워야 한다면 이렇게 말하겠다. 내가 태어난 곳, 내가 영향받은 문화, 내가 읽은 것과 배운 것들, 나의 생각, 그것들이 나를 존재하게 하며 지금 여기에서 나는 그런 것들로 구성돼 있다”라고 말한 바 있다.

한국 폴 리쾨르 연구회 회장인 박성창 서울대 국문과 교수는 “최근까지도 거의 해마다 책을 낼 만큼 왕성하게 활동하셨는데… 너무나 큰 손실이다. 지난 겨울 처음으로 한국 방문을 추진하다가 무산됐는데…”라며 안타까워 했다.

올 겨울 출간을 목표로 700여 쪽 분량의 저서 ‘기억, 역사, 망상’을 번역 중인 리쾨르 연구회는 한국어판 서문을 고인에게 부탁할 계획이었다. 그를 아는 학자들은 겸손하고 온화한 성격에 포용력이 돋보였다고 전한다.

리쾨르는 ‘의지적인 것과 비의지적인 것’ ‘시간과 이야기’ ‘자유와 본성’ 등 20권이 넘는 저서를 남겼다. 한국어판은 전기 ‘폴 리쾨르: 삶의 여정들’(4월 동문선 발행)을 비롯해 10여 권이 나와 있다. 아내는 먼저 세상을 떠났으며 유족으로는 자녀 다섯이 있다.

박석원 기자 spark@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