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여섯 살 나이를 이팔청춘 혹은 스위트 식스틴(Sweet Sixteen)이라고 한다. 하지만 중3이나 고1 나이인 열여섯 살 청소년들이 ‘저주받은 89년생’이라며 자포자기하거나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환경에 대처하는 것을 보면, 달콤한 청춘을 보내는 것 같지 않다.
고1 학생의 촛불집회에 대해 우리 사회는 고민하고 반성하는 대신에 그 책임을 떠넘기기에 바빴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의 학생들에게 엄포 혹은 새 정책 홍보말고 교육당국은 무엇을 했나? 명문대 졸업장이 없더라도 대학 졸업 후에 갈 직장이 있다면 학생들이 그렇게 절규했을까?
교육의 목적은 궁극적으로 사회에서 필요한 인격을 길러내는 것이다. 이러한 명제 아래 현 교육정책에 대해 제언을 하고자 한다. 문제는 고교교육이 아니라 대학교육의 정상화다. ‘3불(三不) 정책’과 같은 소모적인 논쟁을 계속할 것이 아니라 대학이 본래 기능을 제대로 하게 만들어야 한다.
대학 정원이 고교 졸업자 수를 넘어섰으니, 입학 문호를 개방하고 엄격한 학사관리를 통해 졸업을 조절해야 한다. 열심히 공부하지 않고는 졸업할 수 없다면, 명문대일수록 공부하기가 힘들면, 대학 이름보다도 학점이 취업의 우선 요인이 된다면, 지금과 같은 입시경쟁이 있을까?
미국이나 유럽에서 4년 만에 대학을 졸업하는 비율은 비교적 낮다. 미국의 경우 2000년도 자료에 의하면 대학졸업 때까지 걸리는 기간은 공립(주립ㆍ시립) 4.8년, 사립은 4.3년이다. 이는 졸업한 학생들의 평균이며, 공립대학 신입생의 58%와 사립대학 신입생의 45%가 중도에 학업을 포기한다.
한국의 대학은 취업이나 고시학원으로 변했고, 교수들은 학생에게 충분한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과외나 보충수업 같은 고교교육의 비효율성을 말하면서, 훨씬 중요한 대학교육의 비효율성은 말하지 않는다. 비효율적인 고교교육으로 피해를 입는 그룹은 학생들과 학부모에 국한되지만, 대학교육의 비효율은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끼친다.
아이비리그 대학에 다니는 큰아들과 모처럼 외식을 했다. 학기말 시험이 2주 정도 남았는데 지난 일주일 동안 하루에 3~4시간 밖에 못 잤다면서 아들은 식사 중에 졸았다. 미국에서도 명문대 졸업장은 직장에서 큰 위력을 발휘한다. 하지만 명문대에 들어갔다고 졸업 후에 대접받는 것이 아니라, 명문대에서 열심히 공부하였기에 사회에 나와 대접을 받는다.
한국에서 대학생이 공부 때문에 자살하는 경우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미국에서는 학업 스트레스로 자살하는 대학생들이 간혹 있다. 아들이 다니는 대학에서도 두 달 전 한 학생이 자살했다.
대학생이기에 학업 스트레스를 쉽게 조절할 능력이 있다는 것은 아니지만, 사고 능력을 충분히 갖추지 못한 고등학생에게 학업 스트레스가 어느 정도일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학업의 긴 여정 중에 그러한 스트레스를 거쳐야 한다면, 그 시기는 고교 시절이 아니라 대학 시절이 되어야 바람직하다.
대학생은 공부하지 않고 교수는 강의 준비를 충분히 하지 않는다고 한국을 다녀온 한국계 미국 대학생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우리 교육의 정상화는 대학교육 정상화에 있다. 대학교육이 정상화하면 고교교육은 저절로 정상화한다.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인격을 만들어 내는 마지막 단계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다면 중간 단계의 노력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제 대학교육의 정상화에 관한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김민숙 미국 로드아일랜드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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