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인터넷 환경의 기반이 만들어지던 1980년대 중반만 해도 일개 컴퓨터 망 시스템이 이렇게 엄청난 규모로 세계를 바꾸어 놓을 줄을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변화의 크기는 개인이 물건 사는 방식에서부터 정부 조직, 정치의 행태에까지 걸쳐 있는 거대한 것이지만, 그 핵심에는 새로운 매체의 등장과 구 매체의 소멸이라는 마치 공식과도 같은 역사의 흐름이 자리잡고 있다.
중세 영문학을 전공했으나 정작 미디어 비평가로 더 이름을 알린 마샬 맥루한(1911~1979)은 그의 마지막 저서 ‘지구촌’에서 ‘세상이 과연 어떻게 변할 것인가’를 주제로 다가올 미래 사회를 자신 있게 그려내고 있다. ‘전기적으로 형성된 사회에서는 자동차에서 컴퓨터에 이르기까지 제조와 유통에 필요한 모든 중요한 정보가 동시에 모든 사람에게 이용이 가능하다.
망에서 각 지점은 옆의 지점과 마찬가지로 중심적이다. 위계질서는 끊임 없이 해체되고 기획된다.’
지금은 다 아는 이야기라고 할 테지만 맥루한의 이런 구상이 인터넷이 대중화하기 십 수년 전의 작업이란 걸 감안한다면, 숱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그의 탁월한 예언가적 능력을 높이 사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은 그의 동료이던 캐나다의 커뮤니케이션 학자 브루스 파워스가 사후 맥루한의 원고를 정리해서 80년대 후반에 냈다.
맥루한은 이 책에서 과학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일어나고 있는 거대한 변화를 시각적 공간, 청각적 공간, 그리고 테트래드(tetrad)라는 3가지 개념으로 풀어나간다. 선형적인 논리를 앞세우는 서구의 인식 태도를 시각적 공간으로, 위계질서를 거부하고 다양성을 존중하는 동양적 가치를 청각적 공간으로 설명하는 것은 이미 다른 저서에서 언급한 적이 있다.
그의 예언의 상당 부분이 현실이 된 지금도 이 책을 ‘유통기한’이 지나지 않았다고 평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네 개’라는 뜻을 지닌 ‘테트래드’ 구상 때문이다.
‘기존의 질서는 새로운 작품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완전하다. 새로운 것이 잇따라 나타난 뒤에도 기존의 질서가 지속되기 위해서는, 모든 기존 질서가, 만약 약간이라도 존재한다면, 변경되어야만 한다’ 테트래드 구상은 쉽게 풀어 말한다면 시의 역사적 의미에 대한 엘리엇의 정의와 닮았다.
맥루한이 ‘개혁과 새로운 상황의 역동성을 나타내고 예측하는 도구’라고 부르는 테트래드는 인간이 만들어낸 물건이나 제도가 확장-쇠퇴-부활-역전의 4가지 단계를 거쳐 변한다는 개념이다.
예를 들어 화폐가 등장(확장)하면서, 물물교환이 줄어들고(쇠퇴), 이어 북미 인디언들이 부와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겨울 축제에서 포틀래치(potlatch)라는 선물 나눠주기 행사를 벌이는 것 같은 과시적 낭비가 생겨나며(부활) 이어서 신용 혹은 비화폐 현상이 나타난다(역전)는 것이다.
전화가 발명되어 인간의 음성 전파속도가 점점 빨라지면서, 하드웨어로서 인간의 육체는 쇠퇴하고, 신비주의 등이 부활했다가 마침내 전화 회의 같은 집단 음성, 또는 음성의 편재 현상이 일어나는 것도 이런 식이다.
우리가 지금 목도하고 있는 것처럼 컴퓨터, 인공위성, 데이터베이스 등을 활용하면서 대중은 ‘오래된 인쇄지향적 에토스의 잔존물’과 결별하고 있다고 그는 점쳤다.
그리고 무수한 마이크로웨이브 장치와 인공위성을 매개로 국경선 너머로 검열 받지 않은 정보를 대규모로 이동시킴으로써 모든 국가를 정치적으로 불안정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동서양의 가치는 매우 빈번하게 충돌하며 상호영향을 미치겠지만, 그 과정에서 좌반구(시각)적 사고는 우반구(청각)적 공간 속에 가라 앉아 쇠퇴할 것이다. 맥루한은 그것을 인간이 시각 위주의 단선 논리에서 깨어나 통감각(시각 청각 촉각 후각)을 회복하는 과정이라고 풀이한다.
맥루한의 글은 화려한 비유로 넘치지만 비교적 읽기 좋게 번역한 데다 곳곳에 친절한 역자 주가 붙어 있어 읽기에 썩 어렵지는 않다. 다만 책의 무게에 걸맞지 않게 잡지처럼 너무 가벼운 표지를 쓴 것이나, 표지에 대문짝만하게 쓴 마샬 맥루한 영자 이름에 탈자를 낸 성의 없는 편집이 아쉽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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