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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래부 칼럼] 마음 가득 담아 편지 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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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래부 칼럼] 마음 가득 담아 편지 쓰고

입력
2005.05.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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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펜하우어는 대표적인 염세주의 철학자다. 그의 어머니는 남편과 사별한 후 자유롭게 생활하는 인기 소설가였고, 모자는 떨어져 살았다. 쇼펜하우어는 다른 손님들에 섞여 면회일에나 어머니를 만났다.

어느 날 괴테는 그녀에게 “아들이 아주 유명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칭찬했다. 그녀는 버럭 화를 냈다. 한 가족에 천재가 둘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괴테와 아들을 층계에서 밀어버렸다. 아들은 “어머니는 나 때문에 후세에 이름이 알려질 것”이라고 한 마디 던진 후 쓸쓸히 떠났다. 그 뒤 만난 적이 없다.

쇼펜하우어에게 가족은 어머니 뿐이었다. 아내도 자식도 가정도, 심지어 조국도 없었다. ‘철학 이야기’의 저자 윌 두란트는 ‘어머니의 미움을 받았던 사나이가 세상을 좋게 볼 리 없었다’고 적고 있다.

그는 어버이가 되는 것을 최대 악으로 보고, 30년 동안 하숙방 두 개를 빌려 삽살개 한 마리와 고독하게 살았다. 시인 바이런도 모자 사이가 쇼펜하우어와 비슷해서 그 역시 염세주의자가 되었다.

가정의 달을 맞고 있다. 가족 간의 사랑은 자녀에게는 염세주의에 빠지지 않게 하는 예방약이자, 부모에게는 치료약이다. 정이 도타우면 불행과 가난도 두렵지 않다. 가족 하나는 끔찍이 챙겨온 시인 이면우의 시 ‘목련 유감’의 한 구절이다.

<…북한 소년의 말/ 재간 하나 익혀 돈 많이 벌어 오마니랑 동생한테 가갔시오/…난 배 부르면 오마니랑 동생 생각에 운다 말입네다…>

이번에는 소녀들의 편지를 소개하고 싶다. 중학생인 딸이 지난해 자기 친구가 언니로부터 받은 편지를 읽고 감동해서, 집에 가져와 보여준 편지다. 엄마 생일 준비에 맞춰 동생에게 할 일을 이르고 있다. 박진감 있는 편지에 건강한 애정이 넘치고 있다. 동의를 얻었지만 이름만은 바꿔, 좀 길더라도 소개한다.

가혜가 살 것: 생일 케이크(15,000)+꽃다발(15,000)=30,000원이고, 나혜가 살 것: 초밥 큰 세트(11,000)+전동 칫솔(6,000)+신화 테이프(5,200)+마스카라(3,300)+입술 라이너(3,300)=28,800+여분(200)=30,000원이다.

니 언니는 밥까지 굶어가면서 돈 모았으니까, 너도 목숨 걸고 20,000원을 모아라. 초밥은 언제 엄마가 아빠 보고 먹고 싶다 그랬는데, 아빠가 됐다고 그랬어…. 드시고 싶다는데 사 드려야지…. 삼선교 지난 번에 엄마가 시험 전에 밥 사줬던 골목 알지? 그 옆이 초밥집이었잖아.

그 때부터 생각한 건데 대형 세트가 11,000원인가 12,000원이더라고. 입술 라이너랑 마스카라는 새로 생긴 the face shop 알지? 거기서 사. 3,300원으로 잡았으니까 모자라면 보태서 살 수 있으면 사고. 못 사면 내가 한 끼 더 굶지…뭐 ㅠㅠ.

전동 칫솔은 대형 마트 같은 데 가면 있을 거야. 그건 삼선교를 다 뒤져서라도 사야 돼! 여분으로 준 돈은 모닝 글로리에서 예쁜 리본 하나랑 포장지 하나 사와. 테이프는 잘 포장해야지. 꽃은 싱크대 안에, 화장품은 엄마 화장대에, 칫솔은 화장실에, 테이프는 안방 찬장에 넣어둘 거야.

편지지 한 장 더 넣을 테니까 엄마한테 구구절절히 마음 가득 담아 편지 쓰고, 이 봉투에 담아서 엄마 드려. 요번 주 계획표도 같이 넣어두니까, 계획표 들키지 않게 잘 확인하고. 엄마 선물 빠짐없이 사와. From 언니가.>

이런 청소년들 앞에서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는 속담도 허사다. 자라는 아들딸이 말 안 듣는다고 너무 속상해 하거나 미워하지 말자. 그것도 한 때라고 믿고, 다만 정성을 다해 사랑하자.

parkrb@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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