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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공화국 풍경들-고종석의 詩集산책] (11) 申東曄의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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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공화국 풍경들-고종석의 詩集산책] (11) 申東曄의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입력
2005.05.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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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초판 1979, 개정판 1989)는 신동엽(1930~1969)의 10주기에 맞춰 창작과비평사(지금의 창비)가 내놓은 시선집이다.

시인이 생전에 낸 시집은 ‘아사녀’(1963, 문학사)가 유일하다. 작고하고 여섯 해 뒤에 ‘창비신서’ 제10권으로 고인의 시와 산문을 아우른 ‘신동엽 전집’(초판 1975, 수정증보판 1980, 증보3판 1985)이 나왔으나, 그 내용 일부가 긴급조치 9호에 걸려들어 한 달여 만에 판매금지 처분을 받았다.

전집의 수정증보판이 박정희가 죽은 뒤인 1980년에야 나올 수 있었던 만큼, 그 한 해 전에 시선집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를 내놓은 것은 전집 판금 조처를 받아들이면서도 독자들로 하여금 신동엽의 시세계를 흘낏 이나마 엿보게 하려는 출판사측의 고육지계로 보인다.

시인의 대표작이라 할 장편서사시 ‘금강’이 빠지기는 했지만, 이 시선집에는 ‘아사녀’ 수록 작품 대다수를 포함해 신동엽 서정시의 알짜가 담겼다. 전집 속으로 돌진하기에 앞서 신동엽 문학의 테두리를 걸어보고 싶은 만보객들에게 이 시집은 매력적인 산책로라 할 수 있다.

신동엽은 그보다 아홉 해 전에 태어나 한 해 전에 죽은 김수영과 함께 창비 시학의 거푸집을 장만한 시인이다. 이들의 이름은 생전보다 사후에 훨씬 더 큰 울림을 만들어내며 문학과 정치의 관계에 대한 성찰을 촉구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의 시세계는 사뭇 다르다. 생전의 김수영은 신동엽의 참여시에 후한 값을 매기면서도 이 후배시인을 “50년대에 모더니즘의 해독을 너무 안 받은 사람”이라고 평함으로써 슬그머니 그 다름을 내비친 바 있다. 김수영은 그 말을 하는 자리에서 신동엽의 시세계가 혹시라도 쇼비니즘으로 흐르지 않을까 우려했다.

신동엽의 문학공간을 그득 채우고 있는 민족주의적 열정을 지적한 것인데, 기실 이 어기찬 민족주의야말로 신동엽의 이름 앞에 자주 붙는 민족시인이라는 수식어를 실속 있는 것으로 만들었다.

그 민족주의는 신동엽을 창비공화국의 아크로폴리스로 끌어올린 도르래이자, 김수영의 경우와 다르게 그의 시학이 창비의 테두리 바깥으로 번져나가지 못하게 한 브레이크이기도 했다.

이 두 사람의 문학적 엇갈림은 김수영의 지적처럼 민족주의에 대한 태도를 포함하지만, 그보다는 형식적 층위에서 오히려 더 또렷하다. 김수영의 시에선 화자의 정치적 입장이, 물론 4.19 공간의 몇몇 작품에서처럼 새된 목소리에 실릴 때도 있지만, 대체로 자질구레한 일상의 묘사라는 필터에 걸러져 간접적으로 드러난다.

반면에 신동엽의 시는 화자의 생각을 직설적으로, 위풍당당하게 표출하는 데 한결 덜 스스럽다. 에움길을 좋아하지 않는 신동엽의 시적 전략은 더러 독자들의 마음결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절창을 낳는다.

예컨대 4.19정신의 알맹이를 갑오농민전쟁의 연장선에서 파악하며 이를 반제(反帝)평화주의로 승화시키는 ‘껍데기는 가라’ 같은 작품은 구사된 언어의 밀도와 리듬감으로 사람들의 입에 길게 오르내릴 것이다. 좋은 선전이 곧 좋은 예술은 아니지만 좋은 예술은 곧 좋은 선전이라는 격언을 이 작품만큼 유창하게 증명해주는 예도 흔치 않다.

시집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의 화자들에게 소중한 가치는 민족, 민중, 평화, 중립, 자연, 순애(純愛) 같은 것들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가치들의 선양이 자주 아득한 고대국가와 연결된다는 점이다.

시집은 고대에 매혹된 화자들로 붐비고, 그들의 입에서는 “바람 따신 그 옛날/ 후고구렷적 장수들이/ 의형제를 묻던”(‘진달래 산천’)이라거나, “북부여 가인(佳人)들의 장삼자락 맨 몸을 생각하여 보아라/(…)/놋거울 속을 아침저녁 드나들었을 눈매 고흔 백제 미인들”(‘아사녀의 울리는 축고(祝鼓)’), “마(馬), 진(辰) 사람네/ 조개무덤 쌓던/ 댕댕이넌출 고을”(‘여름 이야기’), “너의 눈동자엔/ 북부여 달빛/ 젖어 떨어지고”(‘보리밭’), “꽃들의 추억 속 말발굽 소리가 요란스러우면,/ 내일 고구려로 가는 석공의 주먹아귀/ 막걸리 투가리가 부숴질 것이다// 오월의 사람밭에 피먹젖은 앙가슴/ 갖가지 쏟아져 오면/ 우물가에 네 다리 던지던 소부리 가시내/ 진주알 속 사내의 털 보다 가을이 고일 것이고”(‘만지(蠻地)의 음악)’ 같은 구절들이 흘러나온다. 이 화자들은 아직 훼손되지 않는 완전성의 그림자를 고대의 시공간에서 본다.

이것은 요즘의 급진적 생태주의자들이 근대 이전 시대를 낭만화하는 것에도 비견할 만한데, 아닌게아니라 신동엽의 많은 시들은 자연의 상상력이라고 부를 만한 세계관에 바탕을 두고 있어서 생태문학의 선구로 해석될 여지도 상당하다.

한가로운 독자라면 시집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의 짧은 서정시들을 장편서사시 ‘금강’에 웅크리고 있는 구절들과 비교해 읽으며 시인의 작업과정을 엿보는 재미를 누릴 수도 있을 것이다.

예컨대 ‘누가 하늘을 보았다 求째? 누가 구름 한 송이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로 시작하는 표제시는 ‘금강’의 제9장 도입 부분을 변형시킨 것인데, 이 부분은 “우리들은 하늘을 봤다/ 1960년 4월/ 역사를 짓눌던, 검은 구름장을 찢고/ 영원의 얼굴을 보았다”로 시작하는 서장 제2절이나, “하늘을 보았죠? 푸른 얼굴/ 영원의 강은/ 쉬지 않고 흐르고 있었어/ 우리들의 발 밑에/ 너와 나의 가슴속에// 우리들은 보았어, 영원의 하늘/ 우리들은 만졌어 영원의 강물, 그리고 쪼갰어/ 돌 속의 사랑. 돌 속의 하늘”이라는 구절들을 보듬고 있는 제22장과 은은한 맥놀이를 만들어내고 있다.

또 시집의 가장 뛰어난 작품 가운데 하나일 ‘종로5가’는 ‘금강’의 후화(後話) <1>의 변형인 바, 훼손된 현재를 노래하는 이 대목의 내파(內破)리얼리즘은 치유된 미래를 노래하는 후화 <2>의 외파(外破)리얼리즘과 아름다운 짝을 이루고 있다.

신동엽이 한국 현대문학사의 중요한 이름이라는 것은 공인된 사실이다. 그러나 그 중요성은 그가 이룬 문학의 내재적 가치 때문이라기보다 그가 감당했던 세계관의 시대적 적실성 때문이라는 것을 조심스럽게 지적하고 싶다.

그것은 신동엽이라는 이름이 문학적 이름인 것 이상으로 정치적 이름이라는 뜻이기도 하고, 그 이름이 정치적 맥락에 얹혀 부풀려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신동엽의 시가 뛰어난 성취에 이르는 것은, 예컨대 ‘발’에서처럼, 시인이 제 목소리를 한껏 낮추고 소통의 기교를 세련했을 때다.

‘기교’라는 말의 뉘앙스는 대개 부정적이지만, 시를 포함한 모든 예술을 예술로 만드는 것은 기교다. 기교가 곧 예술은 아니로되, 기교 없는 예술은 상상할 수 없다.

“백화점 층계를/ 비뿌리는 오후, 내려오던/ 다리”에서 시작해 “희끗희끗 눈발 날릴 때/ 중학교 원서 접수시키러 구멍가게 골목/ 종종치던 종아리”와 “아세아 대륙 누우런 벌판을/ 군화 묶고 행진하던 발과 다리”를 거쳐 “뱀같이, 열반같이, 경련하다 급기야/ 나른하게 죽어 뻗던 그 흰 다리”와 “집행장 문앞/ 엉버티었지, 안 가겠다고/ 있는 힘 다하여 안간힘하며/ 마지막 땀 흘리던/ 연약한 다리”와 그 밖의 이런저런 다리를 묘사하며 “발은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하여 있는 것/ 발은 인류에의 길”임을 확인하는 작품 ‘발’ 속에서, 인간은 호모 에렉투스 이래 곧추섬의 위엄으로 우뚝하고 그 위엄을 뭉개는 문명의 폭력으로 왜소하다.

신동엽이 이 작품에서 다리(脚)에 부여한 울림은 이보 안드리치가 자신의 유명한 소설에서 어떤 다리(橋)에 부여한 울림을 연상시킬 만큼 풍요로운 것인데, 이 울림의 풍요로움을 낳은 시적 공간의 입체화 자체가 바로 기교다.

그러나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의 적잖은 작품은 기교의 거추장스러움을 생략하며 태작으로 떨어진다. 많은 경우에 신동엽은 정치적으로 옳으면서도 예술적으로 글렀고, 더러는 정치적으로도 예술적으로도 글렀다.

예컨대 북유럽의 한 나라를 이상화하며 거기 포개진 당대 한국의 현실을 비판하는 ‘산문시 1’ 같은 작품은 삶과 정치에 대한 그의 안목이 만년에 이르러서도 사뭇 표피적이었음을 보여준다. 시적 재능은 일찍 피어 일찍 시드는 일이 잦지만, 이념을 질료로 삼는 시인은 나이와 함께 익은 지혜와 식견으로 자신의 시를 더 무르익게 할 가능성이 높다.

다른 시인들에겐 잉여의 시간이 되기 쉬운 중년 이후가 이런 유형의 시인에게는 세계에 대한 인식을 벼리고 이것을 작품에 반영하는 결실의 시간이 될 수도 있다. 신동엽의 젊은 죽음이 특히 더 아쉬운 것은 그 때문이다.

▲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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