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고 병들어 혼자 힘으로 살기 어렵게 됐을 때 꼭 요양원에 가야만 하는가. 여생이 얼마남지 않은 노인이 정든 가족과 집을 떠나야 한다는 건 너무 슬픈 일이다. 그렇다고 평균수명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요즘 같은 세상에 가족에게만 노인부양을 맡기는 것 역시 가혹하다. 95세 어머니의 기저귀를 65세 노인이 가는 것을 상상해 보았는가….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 ‘온 락’(On Lok Senior Health Services)은 노인을 위한 종합 케어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곳이다. 미국 최초로 보건의료와 복지의 통합서비스를 구축한, 노인케어의 대표적 성공모델로 꼽히고 있다.
“ ‘온 락’은 1970년대 초 차이나타운에서 시작했지요. 당시 이탈리아 중국 필리핀등에서 이민 온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동네에는 요양원(Nursing Home) 같은 노인시설이 없어 장기요양서비스(Long-term Care)를 받으려면 거주지 밖으로, 멀리 나가야 했습니다. 이민자들은 익숙지않은 언어, 음식, 관습에 당연히 고통스러워했고, 친구들이 그들을 찾기엔 너무 멀었죠…”( ‘온락’의 에이미 신 기획실장)
이를 위해 샌프란시스코 지역주민이 자발적으로, 특히 중국 이민자들이 중심이 돼 차이나타운 노스비치 커뮤니티에 ‘온 락’을 설립했다. 온락은 광둥어로 ‘평화롭고 행복한 거처’(安樂居)라는 뜻이다.
노인은 자기가 살고 있는 집에서 가족과 함께 살면서 낮동안만 주간보호센터(Adult Day Care Center)에서 보살핌을 받으면 된다. 의사 간호사 사회복지사 물리치료사 영양사 운전기사 레크레이션 도우미 등 여러 전문가들이 노인을 위한 종합서비스를 펼친다. 상근 의사만 15명이나 된다. 가정의학과, 노인의학, 치과, 이비인후과, 족부클리닉 전문의가 다양한 1차진료를 제공하고 있다.
건강플랜을 총괄하고 있는 에이미 신 기획실장은 “일단 온락에 가입하면 자신의 주치의를 이용할 수 없게 돼 의사선택권을 갖지 못한다는 점에서 일부 노인들은 가입을 꺼리기도 한다”면서 “하지만 데이케어센터엔 늘 의사와 간호사가 상주하므로 평소보다 훨씬 다양한 종류의 의료서비스를 자주 이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고 말했다. 결과적으로 이런 서비스를 통해 병원입원율을 크게 낮출 수 있었다. 7~8개의 만성병을 동시에 앓고 있는 허약노인이지만 병원 입원율은 미국 65세이상 전체노인의 평균 입원율 수준이다.
온 락의 대상자 기준은 샌프란시스코나 프리몬트에 거주하는 55세 이상 노약자. 혼자 힘으로 생활하기 어려워 지속적으로 케어 및 의료서비스를 받아야 하는 노인들이다. 불결하게 사는 노숙자 노인은 감염이 우려돼 제외된다.
현재 온 락에 등록된 노인은 950명. 한국인도 12명이 있다. 데이비드 베이커 온락 사업개발과장은“평균 83~84세로 여자가 4분의 3을 차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곳 노인의 40~45%만이 가족과 동거 중이고, 30%는 독거노인, 15%는 노인주택등에 거주하면서 온 락을 이용하고 있다. 그는 노인들에게 데이케어센터 이용을 권장하지만 강제조항은 아니다”고 말한다. 노인들은 1주에 1~5회 이곳을 이용한다. 건강상태, 개인적인 요구수준, 가족 여건에 따라 맞춤식의료와 복지서비스가 제공된다.
이들이 지불하는 비용은 월 5,000달러 정도. 미국 요양원 이용료에 비하면 매우 낮은 비용이다.
대부분 노인은 메디케어(1,300달러)와 메디케이드(3,600달러)를 통해 급여를 받고 있다. 메디케어만 갖고 있는 일부 노인은 본인이 2,000달러이상 부담해야 한다. 따라서 메디케어와 메디케이드를 둘 다 갖고 있지 않으면 사실 이용하기가 쉽지 않다.
온 락의 모델은 미국 전역으로 확산 중이다. ‘PACE’(Program of All Inclusive Care for the Elderly)란 이름으로 40여개가 운영 중이며, 캘리포니아주에만 4개가 있다.
“온 락의 목적은 요양원 입소를 최대한 막고 자신의 거주지에서 품위있게 노후를 보내도록 하자는 것이지요.” 에이미 신 실장은 “누군가의 도움을 받으며 산다는 일은 정서적으로 한 인간을 수치스럽게 만들 수 있다”면서 “존엄성을 유지하며 늙을 수 있도록 (‘Age with Dignity’)하자는 게 온 락의 목표”라고 말했다.
샌프란시스코= 송영주 의학전문대기자 yjsong@hk.co.kr
■ 전문가 눈으로 보니
베이비 붐 세대들의 노년층 진입을 눈앞에 두고 있는 미국은 노인인구가 2000년 3,400만 명(전인구의 12%)에서 2030년에는 6,800만 명(19.5%)으로 두 배 증가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현재 GDP의 13%를 차지하는 의료비가 2011년 이후 17%로 증가할 것으로 추계되면서 노인을 위한 효율적인 의료·요양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 분주하다.
미국 노인의료·요양제도의 양대 축은 메디케어(Medicare)와 메디케이드(Medicaid)이다. 메디케어는 65세 이상과 장애인을 위한 연방정부의 공공 의료보험이고, 메디케이드는 저소득층을 위한 의료급여를 제공하는 연방정부와 주정부의 공적 부조 제도다. 1965년 사회보장법령이 제정되어 이 두 보험제도가 운영된 지 올해로 40년이 된다.
보험은 병원, 외래 등 기본적인 의료서비스뿐 아니라 메디케어에 의한 단기요양, 재가의료, 호스피스, 메디케이드의 요양시설, 재가의료서비스 등 ‘장기요양’에 대한 급여를 제공하고 있다. 특징적으로 장기요양서비스의 절반을 메디케이드 재정에서 충당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이 제도가 저소득층 노인을 위한 장기요양의 ‘안전망’(safety net)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문제는 노인이 많이 이용하는 장기요양서비스에 따른 비용이 매우 크고 또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요양원에 장기입원을 하게 될 경우 개인당 연간 4만불 이상이 소요된다.
이러한 요양시설 관련 비용이 급증하는 추세를 보이는데, 1987년과 1996년 사이 280억달러에서 700억달러로 150%나 증가했다. 요양시설 관련 지출의 48%가 메디케이드 재정에서 나가기 때문에 주정부에서는 비용절감에 혈안이 돼 있다. 상대적으로 비용이 적게 소요되는 재가서비스에 관심을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가정간호서비스를 제공할 경우 심한 중증장애 노인일지라도 연간 6,000달러 정도로 비교적 적게 든다.
미국에서는 지난 30여년간 고비용의 요양시설 이용을 최대한 억제할 수 있는 대안으로 지역사회 중심의 재가노인을 위한 시범사업이 시행돼왔다. 샌프란시스코의 온락(On Lok)이 대표적 성공사례다.
미국이 노인요양제도에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고 하지만 그만큼 합리적인 대안을 찾기 위해 다양한 실험을 해보는 나라도 드물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보다 나은 노인케어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 새로운 시도를 주저하지 않는 미국의 개척정신과 지역주민의 협력과 단결을 통한 문제해결방식을 교훈 삼아야 할 것이다. 총론만 무성한 우리나라 노인대책에 지역사회 중심의 노인의료복지 모델 개발을 통한 실제적인 방안이 제시되기를 기대한다.
이윤환 아주대의대 예방의학과 교수(한국일보 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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