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취재진은 샛길로 광주에 들어가는데 성공했다….” 1980년 5월22일 독일 제1공영방송(ARD) 오후8시 뉴스에서는 다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5ㆍ18 광주의 참상을 가장 먼저 알린 목소리의 주인공은 ARD 일본특파원이었던 위르겐 힌츠페터. 5월20일 광주에 잠입해 처절한 현장을 필름에 담은 뒤 케이크 상자에 담아 일본으로 빼돌렸다. 이 필름은 유로비전을 통해 곧바로 유럽전역에 방송되었고, 다음날 미국에서도 그대로 방송됐다. 한국민을 제외한 온 세계가 광주의 비극을 안 것이다.
▦입소문과 귀동냥에 의존하던 당시 상황이 ‘생생한 증거’로 되살아 난 건 외국 비디오 덕분이다. 5월26일 일본 NHK가 방송한 ‘계엄령하의 한국’은 광주항쟁을 다룬 첫 특집형태의 프로그램이다. 얼마 후 국내에 비밀리에 들어와 ‘일본비디오’ ‘NHK비디오’라는 이름을 달고 퍼졌다.
힌츠페터의 필름자료를 기초로 독일 방송이 9월에 방영한 다큐멘터리 ‘기로에 선 남한’은 ‘독일비디오’라는 이름으로 국내에 전해져 진실을 알리는 소중한 역할을 했다. 이들 비디오는 대학가에서 지하서클을 중심으로 은밀히 상영됐고, 향후 민주화 시위의 기폭제가 됐다.
▦한국 민주주의를 꽃피운 원동력이 된 5ㆍ18 광주민주화운동이 어느덧 25살 청년의 나이가 됐다. 하지만 실체적 진실 규명은 여전히 미흡하다. 정확한 사망자수와 최초 발포 명령자, 암매장 여부와 그 장소 등이 밝혀지지 않고 있다.
5ㆍ18 관련 단체들이 13일 발표한 자체 조사결과에 따르면 사망자는 항쟁당시 사망자 165명, 행방불명 65명, 상이후 사망 376명 등 총 606명으로 정부측과 적잖이 차이가 난다.
▦얼마 전 한국사회조사연구소에서 실시한 설문조사는 또 다른 과제를 던지고 있다. 전국의 초ㆍ중ㆍ고 학생 2만7,650명을 상대로 ‘5ㆍ18이 일어난 해’를 물었더니 모른다는 응답이 92.5%였다. ‘5ㆍ18성격’을 묻는 질문에서도 93.2%가 틀리거나 몰랐다고 한다. 현대사 교육을 등한시 한 결과다.
5ㆍ18기념재단 초청으로 광주를 방문한 힌츠페터는 “한국민들은 자유와 평화, 민주주의를 위해 숨진 사람들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5ㆍ18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이충재 논설위원 cj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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