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여성들이 ‘아름다운 여성’과 ‘지적인 여성’이라는 선택의 기로에 선다면 아름다운 여성이 되기를 원할 것이다. 영화 ‘브리짓 존스의 일기’의 주인공 브리짓은 이 시대가 바라는 아름다운, 최소한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끌 만한 여성은 아니다.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All By Myself’를 부르는 브리짓의 모습에서 서글픔까지도 느껴진다. 하지만 그녀를 차지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두 명의 멋진 남성이 있다. 영화가 끝나고 올라가는 자막과 함께 떠오르는 미소는 ‘영화에서나 가능한 일이지’하는 씁쓸한 것이었지만, 그 웃음은 대리만족으로부터 오는 뿌듯함이기도 했다.
얼마 전 지인들과의 만남 중에 ‘여성의 외모’에 관한 이야기가 열띤 토론으로 번진 적이 있다. 아무리 진보적인 남성이라도 여성의 외모를 평가하고자 하는 욕망만큼은 본능의 영역에 속하기 때문에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 주장이 극소수의 의견이라고 단정짓지는 말자. 외적으로 매력이 없는 여성들의 평균소득은 예쁜 여자 동료들의 소득보다 평균 4%가 낮다는 보고 결과가 있다.
하지만 여성들이 진정 두려워하는 것이 남성의 시선, 타인의 평가일까? 당신은 어떤 모임에 가면 어느 여자가 나보다 더 예쁘고 더 좋은 옷을 입었는지 살피지는 않는가?
성형의 충동은 한가인보다 높은 코, 김태희보다 매력적인 눈을 갖고자 하는 욕망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여성들이 아름다워지고자 하는 욕망도 본능이기 때문에 자유로울 수 없다고 말하고 싶은가. 그렇다고 해도 우리 사회의 ‘외모지상주의’는 타인이 아닌 자신으로부터 출발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메트로섹슈얼이다 뭐다 해서 남성들도 더 이상 외모 콤플렉스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게 요즘 세상이다. 하지만 아름다움에 대한 과도한 집착과 망상은 개인을, 나아가 사회를 병들게 한다. 우리가 자신을 외부로부터 평가하는 데서 벗어나 내부로부터 느끼는 방법을 터득할 때,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다.
브리짓은 아랫배를 집어넣기 위해 아줌마 팬티를 입고, 여러 사람 앞에서 술에 취한 채 노래를 불러대지만 결국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한다’는 남자와 해피엔딩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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