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사성폐기물처분장(방폐장) 부지를 선정하기 위한 공개모집 절차가 다음 달 시작된다. 올해 설립이 추진되는 방폐장은 고준위(사용 후 핵연료)를 제외한 중·저준위 방사성폐기물 전용이다. 정부는 이미 지난 달 중순부터 전북 군산, 경북 경주, 울진, 영덕 등에서 지질, 지반 등의 자연환경이 방폐장으로 적합한지 알아보는 사전부지적합성 조사를 실시하고 있다. 이 때문에 공식절차가 시작되기도 전에 일부 지역은 적극적인 유치전에 나서는가 하면 다른 지역은 격렬한 반대여론으로 내홍을 겪는 등 전국 각지가 시끌시끌하다.
◆ 적극 유치, 눈치보기, 결사반대 = 경주시는 방폐장 유치에 사활을 걸고 있다. 그 동안 반 원전운동을 해왔던 경주핵대책시민연대는 3월 말 입장을 바꿔 중·저준위방폐장 유치운동을 선언했다. 경주시의회 역시 지난 달 초 방폐장유치 특별위원회를 구성, 전국 기초의회 중 최초로 찬성입장을 밝혔다. 최근에는 경주시와 시민단체 90여개가 참여하는 ‘방폐장 경주유치 추진단’이 출범, 시·의회·시민단체가 일심동체로 유치를 위해 뛰고 있다.
군산시도 적극적이다. 군산시 공무원들은 5월 들어 휴대폰 전화연결음(컬러링)을 "안전하고 깨끗한 중·저준위 원전센터 유치! 전북발전의 꿈은 이뤄집니다"로 바꿨다. 또 통장, 이장, 부녀회장 등을 원전, 원자력연구소로 보내 견학하게 하는 등 차근차근 방폐장 유치 준비과정을 밟고 있다. 사전적합성 조사를 하고 있는 울진은 군수와 군의회가 반대 입장이다. 하지만 지형조건이 가장 적합한 것으로 나타난 데다 한국전력 본사 이전이 방폐장 부지와 연계된다는 말이 나오면서 분위기가 반전될 조짐이 보이고 있다. 장흥에서는 방폐장 유치를 주장하며 무기한 단식하던 군의회 의장이 탈진해 쓰러지는 일까지 벌어졌다. 강원도 삼척, 양양은 주민, 시민단체의 찬반이 엇갈리면서 반대시위와 성명전이 난무하는 등 내홍을 겪고 있다.
◆ 방폐장 유치전이 일어나는 이유 = 일부에서 반대하고 있는 가운데서도 치열한 유치전이 벌어지고 있는 것은 고준위가 제외된 중·저준위방폐장이란 이유가 크다. 혐오시설이기는 하지만 안전성 면에서는 크게 위험한 것이 아니라는 게 과학적으로 입증됐기 때문이다. 경주지역에서는 "원자력발전소도 짓는 마당에 중·저준위 방폐장을 유치 못 할 이유가 뭐냐"는 말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또 3월에 ‘중·저준위방폐장 유치지역 지원 특별법’이 제정돼 유치지역에 3,000억원을 지원하고 한국수력원자력공사를 이전시키기로 한 것도 유치전이 불붙은 이유 중의 하나다. 부안사태 때도 정부가 막대한 경제적 지원을 약속했으나 법으로 명시가 안 돼 지역주민들의 신뢰를 얻지 못했다.
◆ 올해에는 성사될까 = 하지만 올해 방폐장 부지 선정이 순탄할 것이라고 단정할 수만은 없다. 부안사태 이후 방폐장에 대한 국민여론이 극히 나쁜 상태라는 게 걸림돌이다. 중·저준위 방폐장으로 바뀌었다는 것도 홍보 미흡으로 인지도가 낮다. 산자부 조사결과 방폐장 정책변화에 대한 국민인지도는 전국적으로는 20%, 유치전을 벌이는 경주시도 40%수준에 불과하다. 유치찬성 여론은 이보다 훨씬 못하다. 방폐장 부지선정 절차 개시 이후 시작될 시민단체의 반대운동도 변수다.
산자부 조석 원전사업기획단장은 "6월 공개모집 절차가 시작되는 대로 설명회, 공청회를 개최하고 적극적인 홍보전을 통해 올해에는 반드시 부지선정을 마치겠다"고 밝혔다.
고주희기자orwell@hk.co.kr 전국종합
■ 경제혜택 얼마나/ 유치지역에 3,000억원 특별지원
정부가 내건 중·저준위 방폐장 유치 지역에 대한 경제적 지원은 무척 파격적이다.
우선 방폐장 유치가 확정된 이후 2~3년의 방폐장 건설기간에는 해당지역에 약 3,000억원의 특별지원금이 지급된다. 이 지원금은 지방자치단체의 재량으로 지역발전 또는 주민생활지원에 쓰이게 된다. 이를 테면 농수산물 유통센터를 건립할 수도 있고, 주민의 전기요금을 보조하거나 지역주민 생활안정을 위한 융자금, 주민 자녀들을 위한 장학사업 등에 쓰일 수 있다는 얘기다. 방폐장이 본격 가동되면 연 50억~100억원으로 추산되는 반입수수료 중 일정 비율이 지자체에 귀속돼 고정수입이 된다. 방폐장의 건설과 직원채용 등에서는 지역주민의 우선 참여·고용이 ‘중·저준위 방폐장 유치지역 지원 특별법’ 으로 보장돼 있다. 또 방폐장 유치지역의 지역개발사업에 대해 정부는 국고보조금 인상, 국·공유재산의 대부 등 특혜도 주기로 했다.
특별법에 명시된 한국수력원자력 본사의 이전도 큰 경제적 파급효과가 예상되고 있다. 한수원이 이전할 경우 사옥, 사택, 홍보관 등의 건설비용은 1,200억원에 달해 지역 경제 활성화에 상당한 기여를 하게 된다. 해당 지자체는 한수원이 내는 지방세를 새로운 고정수입으로 확보하게 된다. 지난해 한수원이 서울시에 낸 지방세는 42억원이었다.
지자체가 부수적으로 누리게 되는 또 하나의 특혜는 양성자가속기 사업의 유치다.
정부는 방폐장 유치 지자체가 속한 시, 도에 양성자 가속기 유치권한을 주기로 잠정 결정한 상태다. 양성자가속기는 기능성 복합재료, 전력반도체, 분해성 플라스틱 제조 등에 널리 이용되는 것으로 경제유발효과는 1조원, 인구유입효과도 2만명에 달할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현재 유치 가능성이 거론되는 군산시의 경우 지방세, 세외수입 등 지난해 자체수입은 1,081억원, 경주시는 1,385억원이었다. 울진은 568억원, 영광군은 370억원이었다. 이런 재정상황과 비교할 때 방폐장 유치와 연계된 경제적 지원효과는 무시할 수 없는 ‘당근’이다.
정부는 최근 공공기관 이전과 관련해 유치전이 치열한 한국전력공사를 방폐장 유치지역으로 옮기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방폐장 유치 논란이 벌어지는 일부 지역에서 "한전 이전이 연계되면 유치신청을 하겠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어 그 결과가 주목되고 있다.
고주희기자
■ 중·저준위 방폐장
2003년 극단적인 폭력사태까지 불렀던 부안사태 이후 정부는 원전 정책을 전면 수정했다. 고준위 방사성폐기물을 제외한 중·저준위 방폐장만 건설키로 한 것이다. 지난해 사태의 가장 큰 원인이 안전성에 논란이 큰 고준위 임시저장소를 중·저준위 방폐장과 함께 설치하는 통합방폐장 방식이었다는 점을 고려한 것이다.
고준위 방폐물은 사용후 연료로 방사선량이 매우 높은 물질이다. 전세계의 원전 선진국들조차 그 처분을 놓고 수십년째 영구처분이냐 재처리냐의 논란을 벌이고 있다. 고준위 전용 방폐장은 아직 세계 어느 나라에도 설치된 곳이 없다. 그런데도 정부는 2년전 국민여론을 제대로 들어보지도 않은 상태에서 방폐장 건설을 추진하다 낭패를 당했던 것이다.
이에 반해 중·저준위 방폐장은 위험성이 극히 낮다는 것이 정부 설명이다. 이곳에 보관될 중·저준위방폐물은 원전에서 사용됐던 작업복, 덧신, 장갑, 슬러지, 각종 폐필터와 폐수지 등이다. X-레이 등 방사성동위원소를 이용하는 병원, 산업체, 연구기관의 수거물도 포함된다.
정부에 따르면 중·저준위 방폐장의 연간 방사선량은 0.01밀리시버트로 X-레이 1회 촬영시 인체에 쏘여지는 방사선량의 10분의 1 수준이다. 방폐장이 생기면서 받게 될 방사선량도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받는 자연 방사선량의 100분의 1 수준이라고 설명한다.
중ㆍ저준위 방폐장은 현재 전세계 33개국 70여 곳에서 운영되고 있다. 세계 31개 원자력 발전국가 중 중·저준위 방폐장이 없는 나라는 한국, 대만, 슬로베니아 등 6개 국가뿐이다. 원전 없이 폐기장만 운영하는 나라도 베트남, 호주 등 14개국에 이른다.
우리나라는 중·저준위 방폐물을 원전 내 임시저장소에 보관하고 있다. 그러나 1978년 고리1호기가 가동된 이후 방폐물들이 계속 쌓여 2008년에는 울진원전부터 포화상태가 된다. 정부가 올해 반드시 중·저준위 방폐장 계획을 확정, 내년부터 공사에 들어가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고주희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