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공화국. 공부로 시작해 공부로 끝나는 나라. 태어나면서부터 공부하라는 말만 듣고 어른이 되면 다시 그 말만 하다가 죽는 사람들의 나라. 세상이 온통 학교와 학원으로 뒤덮인 나라. 교육에 돈을 가장 많이 쓰는 사람들의 나라. 그렇다고 모든 사람들이 결코 착하고 성실하지도, 창조적이지도 않는 나라. 특히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이 반드시 그렇지도 않은 나라.
나는 왜 공부를 했는가. 처음에는 무조건 해야했기에 했다. 공부 못하면 아예 인간도 아니라는 식의 강요에 의해 했다. 철이 들면서 그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공부의 지옥에서 빠져나올 수는 없었다. 좋은 대학, 좋은 직장을 위해 치러야 할 시험에 대비하여 공부해야한다는 범국가적 ‘진리’가 있는데도, 그것과 전혀 다른 순수한 ‘진리’를 탐구하기 위해 공부한다고 말하는 나 같은 교수는, 공부에 지옥에 빠진 저 아이들에게는 지옥을 지키는 그 마귀탑의 마귀처럼 보일지 모른다. 게다가 그 마귀탑을 상아탑이라고 우기며 고상함을 가장하는 위선적 마귀로 보일지도 모른다. 차라리 시험 요령을 가르치는 마귀라면 착하기라도 할 텐데.
사상도, 문화도, 학문도 모두 시험을 위한 것이 되어버린 듯한 이 대한공부국에서는 시험을 위해 모든 것이 존재하는 듯 하다. 입시제도를 바꾸는 것 외에 크게 할 일이 없어 보이는 교육부를 없앤다면 사상도, 문화도, 학문도 모두 없어지고 공부까지도 없어지리라고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권력=교육부가 모든 아이들에게 천편일률로 떠먹기를 강요하는 교과서나 그것을 익히기 위한 문제집 따위의 암기는 괴로운 사역이지 즐거운 공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있는가. 그렇기에 아이들이 촛불까지 드는 것이 아닌가? 나도 40년 전부터 들고 싶었던 촛불이고, 공부 아닌 사역이 앞으로도 계속된다면 그 촛불은 결코 꺼지지 않으리라.
우리의 공부와는 상당히 다른 독서가 하나의 시대적인 요구로 서양에서 나타난 것은 대학이 출현한 12세기였다. 이른바 독서시대의 개막이었다. 전통적인 농경사회가 서서히 무너지면서 고향을 떠난 사람들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여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문제에 부딪히면서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로마 말기의 문헌을 읽음에 따라 독서시대, 학문시대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을 양성하기 위한 대학이 필요했고, 유식한 그들 소수 지식인이 무식한 다수 민중을 지도하고 감독하며 관리하는 시대가 열렸다.
그러나 당시의 공부란 전체적, 전인적 교양을 중심으로 한 것이고, 그 교양이란 사회 속의 자기 위치를 알고 사회를 위해 해야 할 일을 탐구하는 것이어서 역사상 최초로 ‘개인’의 사회적 자각을 가능하게 한 것이었다. 그런 공부의 전통은 지금도 기본적으로는 변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대학이 출현하는 과정이나 공부의 내용은 서양의 경우와 상당히 다르다. 우리 사회의 변화는 서양의 역사 몇 백년을 몇 십년으로 줄여야 할 정도로 급격한 것이었고 그것도 주체적이라기보다는 도리어 객체적인 변화의 강요에 의한 것이어서 본래의 모습이 왜곡되기 쉬운 것이었다.
특히 ‘개인’의 사회적 자각을 가능하게 하는 전인교육 중심의 대학 전통은 식민지적 왜곡에 의해 처음부터 불가능했고, 오로지 출세를 위한 교육 인플레이션의 정상에 대학이 존재하여 암기 중심의 전문기능인 양성에 주력했다. 그것이 급격한 초기 산업화 과정에 불가피하게 필요했다는 점을 인정한다고 해도, 지금 우리 사회의 여러 가지 문제가 보여주듯이 그 자체가 옳은 것은 아니었고, 초기 산업화 과정을 벗어난 지금, 무엇보다도 창조적인 인간상이 필요한 21세기의 지금에는 더더욱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근대화라는 이름의 산업화가 휘몰아친 1960년대에 중고등학교에 들어간 나는 암기만을 강요하는 학교공부가 너무나도 싫었다. 그 무렵 철이 들면서 갖게 된 수많은 의문에 학교공부는 전혀 답해주지 않았고 오로지 주어진 토막지식의 암기만을 강요당했다. 그래서 내 공부의 중심은 학교 밖에서 은밀하게 하는 독서였고 그림 그리기나 음악듣기였다. 그것은 시험준비를 위해 그런 공부를 금지하다시피 하는 학교와 사회에 대한 반감을 더욱 부추겼고, 결국 나는 왕따가 되었다.
그 후 어쩌다 보잘것없는 대학교수가 되어서도 마찬가지로 그런 공부를 계속하고 있다. 솔직히 말해 나는 아직도 공부하는 학생이고 죽을 때까지 그럴 것이다. 그리고 공부란 전인적 교양을 중심으로 한 것이고, 그 교양이란 사회 속의 자기 위치를 알고 사회를 위해 해야 할 일을 탐구하는 것이라는 원칙에 충실하고자 노력하여 왔다.
나는 저 어두운 유신시대에 대학을 다니며 그 시대나 사회, 그리고 시험공부의 극치인 법학을 밥학이라고 부르며 절망하면서 당시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은 노동법을 아무런 희망도 없이 공부했다. 그야말로 막연히 ‘노동자를 위하여’라고 생각하면서 아무도 하지 않는 그 공부가 우리 사회에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노동법이나 법만은 아니었고 사회와 자기를 알기 위해서는 폭넓은 공부를 해야 했다. 너무나도 많은 의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는 전체적이고 전인적인 공부가 필요했고, 그런 노력은 지금도 마찬가지로 이어지고 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스스로 그렇게 공부하면서 학생들에게도 그렇게 공부하도록 권유하여 왔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그동안 암기 중심이었던 법학교육의 개혁을 위해 미국식 로스쿨을 도입하고자 하고 있다. 암기식 교육방법을 그만두고 사례 중심의 대화식 교육방법을 도입하여 폭넓은 교양을 가진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법률가를 양성하자는 취지인데, 나는 그것이 로스쿨에서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지금도 가능하다고 본다. 그렇게 교육방식을 바꾸고 학사관리를 철저히 해서 졸업생을 대폭 줄인다면 로스쿨을 도입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사실 그런 교육방식과 학사관리의 개혁은 법학부만이 아니라 모든 대학의 학부나 학과에서도 필요한 것이다. 이를 로스쿨처럼 모든 학부, 학과를 대학원으로 바꾸어야 해결할 수 있다는 발상은 있을 수 없다. 특히 학부 졸업 후 다시 3년의 대학원 과정을 필요로 하는 로스쿨은 경제가 급격히 팽창한 최근 미국에서 생겨난 특유한 제도이고, 켄터키의 통나무집에서 통신공부로 법률가가 된 링컨의 시대에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사실 시험준비를 위한 암기비결 공부만이 판을 친 지금까지, ‘공부의 목적’에 관계없이 점수를 잘 따기 위한 ‘공부의 비결’에만 목말라 한 저 수많은 학생들에게, 나의 로스쿨식 수업방식은 어쩌면 철들고부터 탈선한 ‘잘못된’ 나의 공부방법이니 무익한 짓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언제나 괴로워해야 했다.
다행히도(?) 노동법은 중요한 시험과목이 아니라 보잘것없는 주변과목이어서 학생들 공부에 해(?)가 적었을 지는 모르나, 왜 노동법을 공부해야 하는지, 현실은 어떤지를 알게 하는 나의 수업 방식과 그렇게 공부하도록 요망한 것이 아직도 로스쿨 도입의 본질적인 문제인줄도 모르는 상황을 개탄한다. 게다가 어쩌면 부자의 자녀들만이 로스쿨에 입학하여 그들만이 법률가가 되는 시대에는 노동법이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기우까지 든다. 그래서 로스쿨이 되면 나는 교양학부로 옮겨갈 생각이다.
교육제도는 공부와 직결된다. 그러나 교육제도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교육방식이다. 교수나 교사가 교육방식을 바꾸면 공부도 바뀐다. 교육방식의 변화 없이 교육제도만의 변화로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 교수와 교사가 바뀌어야 공부가 바뀐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학생 자신이 바뀌어야 한다. 왕따가 되어도 스스로 바뀌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선생이 아니라 학생으로서 다시금 묻는다.
나는 왜 공부를 하는가. 우리는 왜 공부를 하는가. 우리가 절망한 시대와 사회를 변혁하고, 자유로운 ‘자기’의 존재가치를 알기 위해, 지금까지는 절망한 공부 자체를 극복하기 위해서 참된 공부를 찾아 스스로 공부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지금이야말로 도구, 수단, 기능으로 타락한 토막지식을 암기하는 공부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바람직한 삶과 사회와 시대를 즐겁게 탐구하는 전인적인 교양의 공부가 필요하지 않을까. 그것이 공부의 올바른 모습이고, 더욱이 지금 이 시대는 그런 공부를 한 사람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닐까.
● 박홍규 교수는 노동법 전공이지만 전공을 넘나드는 저술로 인간의 자유와 권리 신장을 위해 싸워온 르네상스적 인간이다. 그가 낸 50여권의 책 가운데는 전공인 노동법이나 법학 책도 있지만 고야 베토벤 고흐 루쉰 도미에와 같은 예술가를 소개한 평전도 다양하다. 그는 자본주의 국가의 사회시스템을 비판한 이반 일리히를 국내에 처음 소개했으며 중동과 아시아를 뭉뚱그려 생각하는 서구인의 몰이해를 비판한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을 처음 번역했다.
또 전두환 노태우 전직 대통령의 재판을 이끌어낸 이론가였으며 헌법의 자유와 평등 정신을 왜곡한 국내 헌법학계의 문제점을 책으로 비판하고 대중이 재판에 참여하는 제도를 만들기 위해 10년전부터 배심원제 도입을 주창하고 있다. 그는 개인의 권리를 극대화하고 정부의 권한을 최소화하자는 아나키즘을 한국에 소개하기 위해 한국아나키즘 학회를 만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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