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이 많은 지형이 우리나라의 자연적 특징이라는 사실은 초등학교 사회책서부터 나온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에서 이런 사실은 시험 때 외워야 하는 정보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한다. 우리 생활에서 산은 돈벌이를 가로막는 걸림돌일 뿐이다. 따라서 산은 까부수고 파헤쳐야할 거추장스러운 존재다. 이것이 우리의 땅에 대해서 갖고있는 가장 솔직한 인식이다. 할 수만 있다면 온 국토를 평평하게 다림질이라도 하고 싶어 안달들이다. 산은 굴삭기로 파내고 불도저로 밀어버리면 그만인 존재이다. 그래야 뭔가를 더 높고 더 크게 지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나지막한 산 사이에 군집을 이뤄 도시를 꾸렸다. 나지막한 산은 도시에서 능선을 형성했다. 우리나라의 도시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산은 시골 뿐 아니라 도시에도 있는 것이다. 도로를 내고 집을 짓는 능선도 산인 것이다. 능선을 대하는 태도는 산을 대하는 것과 똑같아야 한다.
우리는 서울의 자연환경에서 능선이 많다는 사실을 아파트 짓는 데 방해요소로 인식하고 있다. 근본적으로 능선이 자연환경이라는 것조차 모르고 있다. 도시에는 자연환경이 없다고 생각하거나 인공적 힘으로 밀어붙여 다듬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기계의 힘을 들여 그렇게 자연을 제압하고 바꾼 뒤 더 많은 아파트를 더 높게 짓는 일을 문명의 위대한 승리로 착각한다.
능선을 파헤치는 일이 왜 위험한가. 시각적으로 보기 좋다느니 편안한 마음을 불러일으킨다느니 하는 말은 꺼내지도 말자. 그것은 능선이 미세 기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바람의 방향, 강도, 습도를 조절한다. 능선이 있으면 개천이 있는 법, 개천과 함께 빗물을 조절한다. 이런 작용은 온도에도 영향을 끼친다. 궁극적으로 이런 여러 요소들의 종합적 작용으로 한 도시에서 열환경의 쾌적도가 만들어진다.
서울의 열환경은 구름 치듯 넘실대는 높고 낮은 능선들과 사이를 가르는 개천들이 어울려 만들어내는 자연스러운 결과다. 이것을 인위적으로 잘라내고 깎아내고 파헤쳐 망쳐놓으면 열환경은 악화될 수 밖에 없다. 악화된 열환경을 만회하기 위해 에어컨과 보일러를 더 돌려대야 한다. 이것은 다시 열환경을 더 악화시켜 더 많은 기계를 돌리게 하는 악순환을 부른다.
능선을 파헤치고 개천을 막으면서 서울의 열환경은 나빠지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분지라서 여름에 고온다습한데 능선을 파헤치다보니 자연 지형이 항아리처럼 되면서 공기를 가둔다. 여름 기온이 올라가는 주된 이유다. 겨울에는 터널 효과를 유발해 바람의 각도를 날카롭게 만든다. 능선을 파헤친 자리에는 어김없이 초고층 아파트들이 들어선다. 바람은 그 사이를 소용돌이치듯 휘감아 돈다. 예전에는 없던 겨울철 돌풍 현상이 잦아지는 이유다.
능선을 파헤치지 못할 경우는 그 위에 아예 올라타고 앉는다. 열환경의 입장에서 보면 최악의 상황이다. 능선의 높이를 일직선으로 100m 가까이 인공적으로 높인 꼴이 되기 때문이다. 공기와 습도를 가두는 항아리 윤곽을 더 크고 깊게 만든 것과 같다. 공기의 원활한 흐름을 막고 스모그를 증가시켜 공기 오염의 피해를 가중시킨다.
겨울에는 기분 나쁜 바람이 스산하게 분다. 온전한 햇빛을 보는 일이 힘들어졌다. 옛날 서울의 겨울 날씨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이렇지 않았다고들 한다. 온도는 더 낮았지만 공기는 맑았고 바람은 명쾌했다. 그 사이를 밝은 햇빛이 친절한 벗처럼 비추었다. 한 마디로 ‘쨍’하게 추운 날씨였다. 춥지만 상쾌한 날씨였다. 언제부터인지 이런 날씨가 사라져버렸다. 항상 뿌연 스모그가 정체되면서 그 사이를 삭막한 바람만이 불쾌하게 분다. 모든 일은 점점 실내에서만 하게 된다. 이를 위해 난방을 높여야 하고 이것은 다시 열환경을 악화시킨다.
능선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잘 보여주는 사례로 돈안 2동 재개발을 들 수 있다. 삼선교에서 삼청동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아름다운 능선을 이루던 곳이다. 이곳을 20층짜리 아파트로 재개발했다. 능선 허리는 여지없이 잘려나갔다. 아파트 밑동에는 다시 4층짜리 주차장이 회색 콘크리트 몸통을 흉측하게 드러냈다. 꼭대기도 초고층 아파트가 타고 앉았다. 능선의 부드러운 선은 다 망가졌다.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여기까지는 사실 요즘 서울 시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상황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이것으로도 모자라 층수를 더 높이기 위해 구청 공무원이 뇌물을 받고 4층을 더 짓게 눈감아 준 것이다. 누구 한 명 아파트 층수가 설계된 대로 옳게 올라가는지 세어본 사람이 없었다. 그저 다 저런 것이려니, 높이만 올라가면 더 좋은 것이려니 하고 있는 사이에 건설회사와 공무원이 돈을 주고받으며 불법으로 4개 층을 더 올린 것이다. 그것도 공무원 여러 명이 뇌물을 받은 것도 아니었다. 단 한 명만 매수하면 충분했다.
코미디 같은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불법이라는 사실은 골조 공사가 끝날 때쯤 밝혀졌다. 아무래도 너무 높다 싶어서 이를 수상히 여긴 한 주민이 손가락을 짚어가며 세어본 결과였다. 그러나 이미 상황은 종료된 뒤였다. 아파트 4개 층을 케이크 썰듯이 잘라낼 수도 없는 법, 돈 먹인 건설회사 간부와 돈 먹은 공무원만 감옥 가는 선에서 사태는 덮어졌다. 불법으로 더 올린 그 층수는 그대로 굳어져 합법적 현실로 둔갑해버렸다. 영화 제목 같은 신기한 ‘기문둔갑’ 그 자체였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불법 사생아가 지금 저 아파트다.
능선을 망치는 행위에는 가로 막는 것도 포함된다. 이런 현상도 족보가 있다. 가장 먼저 피해를 본 곳이 옥수동 일대였다. 이곳은 한강을 그린 전통 한국화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지역이다. 그만큼 경치가 좋기 때문이다. 이 산을 좌우에서 아파트가 협공을 해버렸다. 아파트 높이는 산과 거의 같아져 버렸다. 다음은 서부 이촌동. 25층으로 재개발되면서 저 멀리 북한산을 가려버렸다. 환경단체나 시민단체가 나섰지만 경제논리를 이기지 못했다. 이후에는 너무 많아져 버렸다. 이곳저곳 보기 좋은 산들을 아파트들이 병풍 쳐놓은 것처럼 막아버렸다. 최근에 급기야 남산과 경쟁하는 아파트들이 생겨났다. 시선 각도에 따라서는 남산과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남산타워와 경쟁하는 것처럼 보이게까지 됐다.
길음 뉴타운, 아현 뉴타운, 마포 뉴타운, 진관 뉴타운. 요즘 서울시가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강북 뉴타운 개발 사업에서도 능선 요소는 빠져있다. 문화 타운으로 하겠다, 교육 타운으로 하겠다, 온갖 청사진들을 내놓고들 있지만 정작 가장 기본이 되는 자연 지형에 대한 고려는 빠져있다. 밀도를 낮춘다고 하지만 구체적 방안 없이 대부분 용적률로 제한할 뿐이다. 이것으로는 능선 보호는 불가능하다. 처음부터 능선에 대한 생각은 없었다는 얘기이다. 능선을 파괴하지 않고서는 용적률을 다 찾아 먹지 못하게 돼있다.
현재의 용적률 수치, 그리고 용적률로만 제한하는 제도로는 능선 파괴를 막지 못한다. 능선 보호법을 만들어야 한다. 각 구별로 능선이 아름다운 곳들이 많다. 서울뿐 아니다. 어머니 가슴처럼 부드러운 산세가 주요 지형을 이루는 우리나라에서는 어느 곳에서나 마찬가지다. 도시라고 다르게 생각하란 법은 없다. 모든 것은 자연 지형으로부터 시작된다. 사람이 사는 터는 땅의 생김새에 맞춰 지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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