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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생태운동가 쓰지씨 방한…환경재단 초청 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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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생태운동가 쓰지씨 방한…환경재단 초청 좌담

입력
2005.05.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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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생태운동가 쓰지 신이치(53) 메이지카쿠잉(明治學院)대 국제학부 교수가 환경재단 초청으로 한국에 왔다. 쓰지씨는 코넬대에서 수학한 문화인류학자로, 갈수록 황폐해지는 지구환경을 지키기 위해 ‘느린 삶’(slow life)을 주창해 세계적 호응을 얻고 있다. 그는 이 규(李珪)라는 이름이 따로 있는 한국계 일본인이다. 국내에는 ‘슬로 라이프’(디자인하우스) ‘슬로 이즈 뷰티풀’(빛무리)이라는 책이 번역되어 있다. 그가 생각하는 느림보 철학이 꿈꾸는 세상은 어떤 것인가. 그와 환경운동가 최열씨, 생태학자 최재천(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씨가 13일 이야기를 나눴다.

▦최열=달팽이가 그려진 넥타이를 하고 왔다. 환경운동을 하는 것은 바로 이 달팽이처럼 여유있게 천천히 행복하게 살자는 것이어서 환경재단에서 만든 것이다.

▦쓰지=나도 목에 하나를 걸고 있는데 젓가락집이다. (조립식 젓가락을 꺼내며) 일본의 나마케모노클럽이라는 슬로 비즈니스 회사가 만든 것인데, 그 회사의 상징이 게으름뱅이의 상징인 나무늘보, 나마케모노다. 일회용 젓가락을 쓰지 않기 위해 늘 들고 다닌다. 이것은 나마케모노클럽의 또 다른 회사가 만든 보온병인데 이 곳의 상징은 벌새다. 나마케모노클럽은 회사가 4개로 되어 있는데 내 제자들이 운영하고 있다. 일본은 전세계 최고의 자판기천국이다. 550만 대나 된다. 자판기를 운영하기 위해 들어가는 전기량을 다 합치면 원자력발전소 1기분이라고 들었다. 이런 소비문화를 없애기 위해 늘 보온병에 차를 넣어 가지고 다닌다. 오늘도 호텔에서 차와 더운 물을 넣어왔다. (이런 것을 늘 들고 다니니까) 느림은 무겁기도 하다(웃음). 3주 전 지구의 날을 맞아 또 다른 나마케모노클럽의 회사는 책자를 만들었다. 에콰도르 민담인 벌새 이야기를 그림책으로 꾸미고 그 뒤에 지구온난화를 막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소개했다. 숲에 불이 나자 모든 동물들이 도망가기 바빴지만 벌새만은 남아서 한 방울의 물방울을 물어 날라 불을 끄려 했다. 다른 동물들이 비웃자 불새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다." 이게 바로 책 제목이다. 부제는 ‘지구를 식히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 이다. 100g의 이산화탄소를 없애는 것을 물 한 방울로 표시해서 여름철에 에어컨의 기준온도를 27도에서 28도로 높이면 물 반 방울을, 공회전을 5분 줄이면 물 1.1방울을 지구에 떨어뜨리는 것이라고 일러준다. 이제 우리도 벌새처럼 물 한 방울을 떨어뜨리자는 이야기이다.

▦최열=전에 나도 젓가락을 가지고 다녔는데 사람들이 까다롭다고 해서 지금은 갖고 다니지 않는다. 그러나 그 때 그 운동으로 일회용 젓가락이 한국에서는 거의 사라졌다. 환경재단에서 이 책자를 번역, 소개하는 작업을 해야 할 것 같다.

▦쓰지=물방울을 가장 많이 떨어뜨리는 방법은 음식 마일리지가 적은 것을 먹는 것이다. 음식 마일리지란 음식 한 개를 먹는 데 얼마나 많은 이동거리가 들었느냐인데 그 거리에 따라 이산화탄소 소비가 늘어난다. 미국에서 온 딸기 다섯 개 대신 국내서 나온 딸기 다섯 개를 먹으면 7.7방울의 물을 지구에 떨어뜨린다. 제 땅에서 생산되는 음식을 먹는 것이 지구온난화를 막는 데 기여한다. 세계에서 음식 마일리지가 가장 높은 나라가 일본인데 2위가 어디인지 아는가? 한국이다. 그 뒤가 미국이다. 일본에서는 사회가 젊은이들한테 무기력을 가르치기 때문에 자부심이 낮고 희망을 품지 않는다. 이 책을 통해 젊은 친구들한테 ‘너희들이 할 수 있는 일이 굉장히 많다’는 걸 이야기하고 싶었다.

▦최재천=작년에 생태학자 제인 구달을 초청했을 때 그가 한 말도 당신이 한 말과 흡사하다.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해라. 작은 일이든 큰 일이든, 무언가를 하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고 하더라.

▦최열=내가 안 쓰는 단어가 세 개 있다. 바쁘다, 힘들다, 죽겠다. 그런데 사람들은 나더러 바쁘지 않느냐고 묻는다. 나는 바쁘지 않다. 대도시에 있는 삶은 바쁠 수밖에 없지만 혼자 있을 때는 뒹굴뒹굴하면서 슬로 라이프를 산다.

▦쓰지=나도 슬로 라이프를 이야기하면서 매우 바빠졌다.(웃음) 바쁜 것은 필요하다. 삶은 강처럼 때로는 빠르고 때로는 느리게 흐른다. 어릴 때는 활동적이지만 나이가 들면 생각이 많고 느려진다. 바쁜 것이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위해 바쁜 것이냐가 문제다. 우리 사회는 가속화사회라서 경쟁이라는 원칙밖에 없다. 더 빨라야 이긴다는 생각으로 어떻게 남보다 빨리 갈 것인가만 고민한다. 그러니까 내면은 공허해진다. 가족이나 자기 자신, 이웃을 위한 시간을 내지 못한다. 아이들이 아버지를 볼 시간도 없다

▦최재천=나도 바쁘지만 아내도 바쁘기 때문에 매일 저녁 내가 집안일을 돌본다. 나는 1년 가야 닷새나 저녁에 외식을 할까 거의 매일 집에서 아들과 밥을 먹는다. 아들이 밤 9시에 잠들면 그 때부터 새벽 2~3시까지 책 쓰고 논문을 쓴다.

▦쓰지=멋지다. 그래서 나도 경쟁을 위해 바쁜 것보다는 함께 하기 위해 바쁜 것으로 바꿔야 한다고 강조한다. 일본말로 함께 하는 것을 교세(交際)라고 하고 경쟁하는 것을 교쇼(競爭)라고 하는데 교쇼가 아닌 교세를 위해 바쁘자고 강조한다. 경쟁이란 10명이 있다면 9명을 죽이고 1명만 살아 남는 것이다. 경쟁 자체가 사라지는 그런 경쟁은 의미가 없다.

▦최재천=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자연의 법칙에서는 경쟁은 불가피하다. 북미 영양 가운데는 놀라기만 하면 시속 60~ 70㎞씩 달리는 종류가 있다. 다른 동물들이 느리기 때문에 그렇게 빨리 달릴 필요가 없는데도 그렇다. 하지만 진화의 법칙에서는 빠른 동물만이 살아 남았다. ‘슬로 이즈 뷰티풀’이라고 하지만 자연의 법칙을 뛰어넘는 이론을 제시해야 하지 않나.

▦최열=선진국에서 후진국을 도와주기 위해 ‘슬로 이즈 뷰티풀’이라고 할 수는 있지만 후진국을 계속 후진국으로 만드는 슬로 라이프가 될 수도 있지 않은가.

▦쓰지=슬로 라이프가 더 넓은 집에서 더 좋은 유기농 식사를 하는 방식이 되어서는 안된다. 요즘은 국가생산량 개념으로 국가의 풍요를 재는 GNP개념에서 행복의 개념으로 풍요를 재는 GNH 개념이 등장하고 있다. 6월에는 캐나다에서 국제심포지엄도 열린다. 그런 점에서 가난한 나라 사람들이 행복한 것을 우리가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경쟁이 생명계의 필수적인 요소라는 말은 인정하지만 그것이 유일한 원칙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인간에게는 살아가는 이유가 있어야 하는데, 경쟁이란 모든 사람이 똑 같은 목표를 갖고 사는 것이다. 경쟁을 통해 사람의 마음 속에 자극과 동인(動因)이 생겨나긴 하지만 인간이 모두 똑같은 목표를 갖는다면 너무 불행하다. 걷는 것만 해도 목표지점에 빨리 도착해야 하는 걷기가 있는가 하면 목표 없이 꽃이나 보고 즐기려는 산보도 있다. 밀란 쿤데라(체코 출신 소설가)가 재미있는 말을 했다. 인간은 무슨 생각을 하려면 천천히 걷지만 무언가 잊기 위해서는 빨리 걷는다. 지금처럼 경쟁과 속도만을 외치는 문화는 무언가를 잊자는 것이다.

▦최재천=실은 나도 아까 제기한 의문의 답을 풀고 있는 중이다. 경쟁은 부인할 수 없는 자연의 원칙이다. 그러나 어떻게 경쟁해야 할 것인가는 다른 문제다. 우리는 지구 상에서 인류가 가장 우월한 종인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은 지구에서 가장 강성한 것은 식물이고 곤충이다. 이들의 생존원칙을 보면 동료를 도움으로써 공존한다. 그래서 곤충이 종류가 가장 많고 숫자도 많다. 남성 생태학자들은 98%가 경쟁에 대한 것을 연구하지만 여성 생태학자들은 공존과 협동에 대해서 연구한다. 우리는 동물만을 보고 경쟁과 도태만을 이야기하는데 진짜로는 협동과 공존을 아는 곤충과 식물이 가장 번성했다. 경쟁자를 죽이는 것은 1차원적인 경쟁이지만 경쟁자를 살리는 것은 고차원적인 경쟁이다. 모든 살아남은 생태계는 친구가 있다. 국가 간에도 교환이나 교류 프로그램으로 너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너를 돕는 것으로 더 발전하는 시스템이 가능하다. 2년 전 일본에서 열린 심포지엄에 참석해 호모 사피엔스(지혜로운 인간)가 아니라 호모 심비오스(공생하는 인간)를 21세기형 인간형으로 제시했다. 경쟁은 있어야 하지만 이기는 경쟁을 하라. 그것은 바로 협력하는 경쟁이다.

▦쓰지=멋진 생각이다. 우리도 협력을 기반으로 하는 경제를 생각한다. 제3세계 이야기를 더 하자면 이들이 우리보다 더 행복하다. 물질적으로는 가난하지만 사랑받고 사랑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

▦최재천=쓰지씨의 책을 보니 옛날 일본의 에도(江戶)시대가 3,000만명 정도의 인구로 자력갱생하는 사회였다는 데 정말 대단하다. 우리도 지금 이 땅에서 그렇게 살 수 있는 도시를 만들어야 할 과제가 있다.

▦쓰지=그런 점에서 한국에도 스몰 비즈니스를 권한다. 돈을 많이 버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일을 하는 데서 즐거움을 누리는 회사들을 많이 만드는 것이다. 사업에도 빌 게이츠 스타일은 부자가 되어 돈을 많이 기부하는 것이지만, 이것은 상대방의 자부심을 꺾는 일이다. 일하는 즐거움 자체를 나누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생태적인 철학을 공유하는 슬로 비즈니스를 환경단체에도 권유하고 싶다.

정리=서화숙 대기자 hssuh@hk.co.kr

●GNP가 아니라 GNH(국민 총행복량)

국민총생산량(GNP, Gross National Product)이 아니라 국민총행복량(GNH, Gross National Happiness)으로 삶의 질을 잰다면 어떤 기준이 적용될까. 쓰지씨는 다음과 같은 항목을 제시했다.

1. 얼마나 많은 시간을 가족과 보내는가

2. 얼마나 많은 여유시간을 갖는가

3. 얼마나 많은 시간을 친구, 이웃과 보내는가

4. 얼마나 적은 돈으로 행복할 수 있는가

5. 기계나 도구(가령 가라오케)의 도움 없이도 얼마나 많은 노래를 부를 수 있는가

6. 멋진 차, 훌륭한 레스토랑, 돈 없이도 행복한 데이트를 할 수 있는가

7. 얼마나 자유로운가

8. 일하며 행복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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