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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실에서] 엄마의 나라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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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실에서] 엄마의 나라로 가자

입력
2005.05.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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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논설위원실에서 국적포기 문제를 놓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문득 옛 취재 기억이 떠올랐다. 미국 서북부 오리건주에 그레샴이라는 작은 마을이 있는데, 한때 하와이 사탕수수 이민자 20여명이 이주해 정착했던 곳이다. 20년 전 이곳에 취재하러 갔을 때, 사탕수수 이민자는 다 세상을 떠나고 서너 가구의 유가족만 살고 있었다. 그들 중에 박말순 할머니(당시 79세)가 있었다. 몇 명 생존한 사진결혼 주인공 중 한 사람이었다. 내가 찾아갔을 때 박씨는 한평생 해 온 딸기밭 농사일을 하고 있었다. 그와 반나절을 같이 하면서 초기 이민생활의 애환을 들었다.

1923년 부산에서 여학교를 다니던 17세 소녀는 젊은 미남 청년의 사진 한 장만 보고 미국행 기선에 몸을 실었다. 40여일간의 항해 끝에 시애틀 부두에 도착한 소녀는 마중 나온 사람을 보고 시아버지이거나 친척인 줄 알았다. 그러나 이내 신랑이라는 사실을 알고 땅이 꺼지는 것 같았다. 신랑은 나이가 43세나 된 데다 하와이 사탕수수밭 땡볕 아래서 중노동에 시달려 영락없이 환갑 언저리의 늙은이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기차를 타고 신랑이 산다는 몬태나로 갔다. 마구간 옆 움막에서 신랑의 친구라며 우르르 몰려나온 중늙은이들에 둘러싸여 약식 결혼식을 올렸다. 꿈 많던 소녀는 농장 노동자의 아내가 되어 해가 뜨면 밭에 나가 해가 질 때까지 김을 매야 했다. 중노동에 몸이 상했던 남편은 아내와 1남5녀를 두고 일찍 세상을 떠났다. 혼자 가족의 생계를 떠맡은 박씨가 희망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순진하게 크는 아이들이었다.

그런데 애들이 자라 학교에 다니게 되면서 문제가 생겼다. 인종차별이 심했던 당시 백인아이들이 어린 가슴에 못을 박을 정도로 박씨의 아이들을 차별했던 것이다. 하루 종일 일하고 지친 몸으로 집에 돌아와 저녁을 차리던 어느날 맏이 오뉘가 울면서 엄마 품에 매달렸다. "엄마 나라에 가서 살자."

박씨는 ‘엄마의 나라’로 가자는 애들을 끌어안고 셀 수 없이 많은 밤을 울며 지샜다고 했다. 정말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6남매를 데리고 돌아갈 엄두도 나지 않았고 방법도 없었다. 일본에 빼앗겨 돌아갈 나라도 없을 때였다. 한 식구나 개인에게 ‘나라’가 무엇인지를 많이 생각하게 했던 사연이었다.

개정 국적법 발효를 앞두고 길게 늘어선 국적포기 행렬을 놓고 사회적 논란이 가열되고 있다. 논란이라기보다 국민적 비난이다. 병역의무를 앞둔 청소년들이 대부분이지만 병역이 무엇인지 자기선택이 무엇인지 모르는 아기들까지 부모에 의해 국적포기 행렬에 합류되고 있다.

속지주의 국적 제도를 취하는 영미권 국가, 특히 미국에 유학 및 근무, 그리고 원정출산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2중국적자 문제는 필연적인 일이다. 비난의 논거는 간단하다. 이들 2중국적자는 우리나라 제도에서 유리한 것은 취하고 불리한 것은 버리니 이것이 공평치 못하다는 것이다. 병역의무는 그 중 하나이다. 또한 이들의 부모들이 외국생활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사회 지도층인데도 책임감을 느끼지 않으니 이에 대해 느끼는 것은 사회적 배신감이다.

국적포기자에게는 국내체류 외국인 노동자에 준하는 엄격한 대우를 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올 정도로 여론이 나쁘니 응징성 법령이 나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논란을 통해 그동안 우리가 무시했던 점들을 개선하는 계기를 생각하는 것도 필요하다. 예를 들면 국적을 바꿀 수 없는 더 많은 젊은이들이 병역의무의 중압감과 불이익을 덜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라든지, 한국 사회에서 궂은 일을 다하는 외국인 체류자들이 한국에서 낳은 아이들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야 할 것이다.

개인에게 나라란 무엇인가. 그리고 한 나라에 국적을 가진 비거주자와 국적을 안 가진 거주자는 어떤 존재들인가. 이제 진지하게 논의해야 할 주제들이다.

김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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