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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 떠도는 몸들-산정에서 땅으로 내려와 세상과 불화한 예술혼 순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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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 떠도는 몸들-산정에서 땅으로 내려와 세상과 불화한 예술혼 순례

입력
2005.05.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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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꽃이 피어 있다

진눈깨비 하얗게 몰려가 얼어 있구나. / 잔뜩 흐려진 마음으로

내려놓은 마음 몇 송이. / 덜 마른 물감처럼 젖어 있는 하늘.

아무래도 나는 저 무덤 앞에

더러운 지폐로 사들고 온 꽃을 올려놓고 내려온 것 같다.

올려놓았지만 바람이 모로 쓰러뜨린 꽃.

하늘에 성냥불 한번 댕기지 못하고 공회전하다 멈춘

연소불량의 하루 혹은 젊음.

빨리 타기를 기다리며 / 아니 빨리 타주기를 기다리다가

내 젊음은 무참하게 장미꽃들을 꺾으며 휘날려버렸다.

침엽수림 안쪽에서 나무들의 파안대소 / 저 하늘의 박장대소.

누군가 또 꽃 조용히 내려놓고 내려간 무덤에

방금 따온 듯한 눈물 / 새로 피어 있다. 내 두 손이 너무 더러워져 보인다.

조정권(사진) 시인이 10년 만에 신작시집 ‘떠도는 몸들’(창비 발행)을 냈다. 성숙한 영혼의 무게로 누르지 않는 한 "육신이란 바람에 굴러가는 헌 누더기에 지나지 않는다"(‘산정묘지1’)던, 그래서, 가장 추운 겨울 산정에 올라 가장 높은 정신을 갈구한 시인이다.

하산한 시인은, 세상과 불화하며 높은 정신을 구현한 시인 화가 음악가들의 자취를 찾아 떠돌면서도 여전히 그 정신의 높이에 닿고자 갈구하는 시편들로 시집을 채웠다. 그 힘든 여정에 시인은 절망도 하고 발목 붙드는 일상에 분노하고 냉소하고 자책도 한다. 독일의 한 시인 기념관에서 "‘난 산 게 아니다. 연소된 것이다’/ 그 문 앞에서 내 삶은 후들후들 떨린다/ 내 발길은 갈지자로구나"(‘떠돌았던 시간들’)라고도 하고, "장례차 행렬로 길 막혀 짜증내는 혀./ 그 길거리에서/ 혓바닥만 날름거리는 시."(‘내 속의 혀가 뛰쳐나와’)라고도 한다.

위 시도 같은 맥락에 놓인 시로 읽힌다. 누구의 무덤(정신)일까. 누군가 갖다 둔 "방금 따온 듯한 눈물"같은 꽃 앞에, 더러운 지폐와 바꾼 꽃 두고 온 자신의 손을 부끄러워하는 그 ‘정신’도 이미 높아보이는데 말이다.

최윤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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