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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 소외, 핫라인 - 꿈을 꺾는 독재자…꿈을 꾸는 민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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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 소외, 핫라인 - 꿈을 꺾는 독재자…꿈을 꾸는 민중

입력
2005.05.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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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 출신 작가 루이스 세풀베다(사진)의 문학은 참으로 위태로운 지점에 서 있는 듯하다. 정치 경제 군사 환경 문화 등 여러 현실에 열정적으로 개입해서 고집스레 ‘윤리’의 편에 서 온 이 ‘행동하는 지성’의 완고함이, 때로는 카멜레온처럼 변덕스러워야 하고 위선과 위악에도 유연해야 하는 문학과 공유할 수 있는 공간이란 그리 넉넉치 않아보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문학과 구호, 문학과 ‘말씀’의 경계가 멀지 않기 때문이고, 이데올로기와 맞선 정신이 새로운 이데올로기로 굳어질 위험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세풀베다의 문학이 돋보이는 것은 역설적으로, 윤리·현실·행동의 아슬아슬한 역설 위에 구축된 미학이기 때문인지 모른다. 작가는 신작 소설 ‘핫라인’과 이야기책 ‘소외’를 통해 다시 한번 윤리와 미학의 멋진 만남을 유감없이 과시한다. 그의 글은 독서의 즐거움과 행복감을 선사한다.

●소외

35편의 짤막한 이야기들이 묶였다. 첫 글 ‘소외된 이야기들’은 작가가 독일의 한 유대인 수용소에서 경험한 바의 이야기다. "수용소 한 쪽 구석,… 까칠한 돌멩이 표면에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누군가 칼끝이나 못으로 아주 처절하게 호소한 것이었다. ‘나는 여기에 있었고, 아무도 내 이야기를 하지 않을 것이다’…." "죽은 자 한 명은 엄청난 스캔들이고, 죽은 자 수천 명은 통계"라던 나치의 선전관 괴벨스의 말이, 민주주의를 가장한 그들의 공범들에 의해 반복돼왔고, 지금도 반복되고 있음을 아는 작가는, 살인마들이 "육체적 죽음 위에 덧씌운 망각과 익명이라는 또 다른 죽음", 곧 ‘통계’의 이면을 이야기하겠다고 한다. "브라질 시인 기마랑스 호자가 말했듯 이야기하는 게 저항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칠레 피노체트 독재시절, 모진 고문으로 멍든 서로의 눈과 부은 입술을 보며 "아이라인이 번졌어" "립글로스가 안 좋은가봐"라면서 끝내 동지를 팔지 않았던 이들, 결혼을 앞두고 정부군에 의해 암살당한 애인을 대신해 밀림 반군들과 나란히 선 여인 등을 이야기한다. 그가 이야기하는 일상의 영웅 중에는, 헐릴 처지에 놓인 이름 없는 건물의 한 식당 주인도 있고, 바람 중에 떠도는 1그램의 꽃가루도 소중히 여기는 밀림 인디오도 있다. ‘미스터 심파’는 배를 너무나 사랑하는 벵갈 출신의 떠돌이 노동자다. 그는 온갖 궂은 일을 다하며 배를 얻어 타 항구를 떠돌며 자신의 파라다이스를 꿈꾼다. 훗날 그는 ‘티모르’라는 섬에 정착해 ‘지구상에서 가장 크고 값싼 배의 무덤(폐선장)’을 운영한다. 선주가 수명을 다한 배를 연안으로 끌고 오면 그는 그 배에 올라 만조 때까지 배와 대화를 나눈다. "배들이 거쳐 간 모든 항구들과 배들이 들은 모든 언어들, 모든 선원들, 모든 깃발들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배들은 숭고한 짐승들이라, 여기 파라다이스에 만족해서 도착합니다." 이 망명한 유랑작가는 스페인 북부 칸타브리아 해 연안의 ‘아스투리아스’라는 곳에 산다. 스페인 역사에서 가장 고통 받고 소외당한 사람들의 땅, 의지와 저항의 가치를 믿는 이들이 사는 땅, "모든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미래를 믿고 노래하고 마시고 독서하고 일하고 생각하게 하는 세계"라고 한다.

●핫라인

필름느와르 풍의 흥미진진한 소설이다. 원주민 인디오 출신의 우직한 한 시골 형사가, 청산되지 않는 독재정권의 군부 실력자에게 맞서 그 추악한 범죄행각을 까발린다는 내용이다.

파타고니아 깡촌의 가축 절도 전담 형사인 마푸체 인디오 ‘카우카만’은 소도둑 현행범인 군부 실력자의 아들에게 총상을 입히고, 그 보복 인사로 수도 산티아고의 성범죄 담당으로 전출 간다. 그는 도시에서 집요한 테러 위험에 직면한다. 소설은 카우카만의 시선을 통해 파타고니아의 풍성한 자연과 ‘차갑고 황량한 도시’를 대비하며, 인종적 편견과 문명 권력 자본의 이면을 폭로한다. "시골 형사는 도시의 법칙 역시, 콘도르 둥지의 법칙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다. 피곤에 지친 콘도르가 둥지를 잘못 찾아들면, 둥지 주인인 콘도르는 잘못 찾아 온 콘도르를 유심히 관찰한 다음 곧바로 잡아먹어 버리는 법이다."(44쪽)

‘핫라인’은 폰섹스 서비스를 일컫는 말이다. 군사정권의 블랙리스트에 올라 오랜 망명생활을 해야 했던 이들이 민주화됐다는 조국에서 ‘전화방’사업으로 생계를 꾸려야 하는 삶의 아이러니. 또 변함없이, 다만 좀 더 은밀히 자행되는 고문과 학대의 역사의 아이러니. 서사는 소설 끄트머리에 이르러 극적 반전을 시도한다.

세풀베다에게 작가란 목소리를 갖지 못한 자들의 대변자다. 그는 자신의 문학적 밑천 두가지, 곧 제국의 침탈과 군부의 압제로 점철된 라틴아메리카의 그늘진 현대사, 남미의 광활한 자연과 인디오로 상징되는 민중들의 건강한 세계관으로 하여 독자들을 능란하게 웃기고 울리고 있다. 그는 서문에 "뒤마가 ‘몽테크리스토 백작’에서 ‘잊지도 말고 용서하지도 말자’라는, 우리에게 남겨 준 도덕적 유물이 21세기를 살아가는 성실한 자들을 결속시킬 수 있다면 이 이야기가 대중소설이어도 좋다"고 적었다.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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