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영변 원전 폐연료봉 인출 후 정부는 상황의 심각성을 감안해 모든 가능성에 대비하되, 차분하게 대응한다는 쪽으로 대응 기조를 잡았다. 반기문 외교부 장관은 12일 "낙관도 비관도 하지 않으며 차분히 대응하겠다"고 말했다. 이런 기조는 아직도 타협의 여지가 있고, 갈 길도 멀다는 판단에 바탕을 두고 있다.
당국자들은 북한의 이번 조치가 협상용 일 수도 있고, 핵 보유를 기정사실화하면서 핵무기를 증강시키려는 수순일 수도 있다고 본다. 어떤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는다. 다만 최악의 시나리오에 대해서는 함구한다. 그런 언급 자체가 대화여건 조성에 도움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상황을 악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타협의 여지를 넓히려는 당국자들은 이번 폐연료봉 인출이 2003년에 북한이 행한 바 있는 위협의 ‘재탕’이고, 아직도 핵무기 원료인 플루토늄을 추출하는 재처리 작업까지는 2개월 이상 남아있다고 강조한다. 국면을 파국으로 몰고 갈 핵실험과 이번 조치는 결코 같을 수 없다는 것이다.
또 4년 정도 가동해야 플루토늄을 많이 추출할 수 있는데도 서둘러 2년 만에 폐연료봉을 꺼내 흔들어대는 북한의 의도도 헤아려야 한다고 말했다. 아직까지는 북한이 파국으로 내달리지 않고 나름대로 위기를 관리하는 행태를 보이고 있다는 분석이다.
이런 맥락에서 정부는 국면을 안정적으로 관리하고, 6자 회담을 통해 북핵 타결의 전기를 마련한다는 기본 기조를 수정할 필요가 없다고 보고 있다.
한국 미국 중국 정상들의 고공 외교로 최근 냉각국면 해소의 단초가 마련되려는 상황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앞으로 정부는 북한이 더 이상의 상황악화 조치를 취하지 않도록 하는 데 외교력을 집중할 것으로 보인다.
정부가 북한에 쓴 소리를 할 가능성도 높다. "북한에게 얼굴을 붉힐 때가 되면 붉히겠다"는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도 있었고, 여기서 제동을 걸지 못하면 심각한 위기가 조성될 수 있어 마냥 부드럽게만 나갈 수는 없다. 미국의 강경한 입장도 감안할 필요성도 커졌다.
따라서 정부는 통상의 중재 노력과 함께 ‘고강도의 정치적 타결’을 미국에 주문하는 방안을 검토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폭정의 전초기지 발언을 두고 벌이는 북미간의 지루한 실랑이는 결국 신뢰 부족에서 기인하기 때문에 정부는 북미 양측에 신뢰 회복조치를 동시에 내놓아라고 요구할 가능성이 있다.
1차 북핵 위기 당시인 1993년, 김용순 당시 노동당 국제담당 비서가 미국을 방문해 아놀드 캔터 국무부 정무차관을 만나 대화채널을 연 것처럼 고강도의 처방만이 꼬일 대로 꼬인 실타래를 풀 수 있다.
앞으로 열릴 한미정상회담에서는 이런 방안이 논의될 전망이다. 이런 처방이 마련되고 중국이 대규모 대북 경제지원을 지렛대로 북한을 설득하면 회담 재개의 불씨는 살아날 수 있을 것이다.
이영섭기자 youngle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