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삼성화재가 우승했냐며 재미없다는 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선수인 제 입장에선 열심히 뛰다 보니 실력으로 우승한 것 뿐이에요."
8일 끝난 프로배구 원년 챔프전에서 삼성화재를 우승으로 이끌며 최우수선수(MVP)로 뽑힌 김세진(31)이 우승 후 대뜸 던진 말이다. 리그 9연패(실업 성적 포함)의 주역이며 MVP만 올 해까지 4번째 받았다. ‘월드 스타’란 수식어가 어색하지 않다. 그러나 시즌 전 그 자신조차 이렇게 웃을 수 있을 줄 몰랐다. 지난 해 이혼으로 힘든 시간을 보낸 데다 배구선수로서는 치명적인 무릎 수술까지 받는 등 시련이 많았기 때문이다.
"배구를 그만두려고 했어요. 감독님께 은퇴하겠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하지만 신치용 감독은 "감정적으로 대처하지 마라. 사랑하는 제자를 이렇게 잃고 싶진 않다"고 말렸다. 결국 "여기서 그만두게 놔두면 사람 망가질 것 같다"는 신감독의 설득에 맘을 고쳐먹었다.
"흔들릴 때 감독님이 잡아 주셔서 쉬면서 다 털어 버렸습니다. 편하게 시즌을 맞았는데 개막전에서 현대캐피탈에 패하자 정신이 번쩍 드는 거에요." ‘삼성화재가 올해는 김세진 신진식이 노쇠하고 정상 자리가 흔들린다’는 주위의 수군거림도 크게 들려왔다.
김세진은 "솔직히 올해처럼 힘들게 우승한 적이 없었다"고 말한다. 삼성화재가 최강의 전력을 자랑하며 무적함대로 불려오던 지난 8년간은 일찌감치 전의를 상실한 상대팀들이 쉽게 무너지는 경우가 적지 않았지만 올해는 사정이 달랐다. 큰 키에 높은 블로킹, 강한 체력, 이기겠다고 모질게 달려드는 현대캐피탈의 공세를 물리치고 치열한 전투 끝에 얻어낸 우승컵이다.
그래서 그런지 아직도 쉬어 있는 그의 목소리에는 당시의 긴장과 우승의 환희가 그대로 묻어 나온다. "우승 후 눈가에 눈물이 핑 돌았어요. 하지만 뼈가 뒤틀리고 인대가 늘어나는 발목 부상에도 투혼을 발휘한 팀 후배 최태웅이 경기장에 엎드려 눈물을 쏟는 것을 보곤 참았습니다." 예년의 우승과 달라선지 신치용 감독도 우승 뒤풀이에서 "그간 얼마나 괴로웠는지 울고 싶다"며 "그동안 열심히 한 죄 밖에 없다"고 말했다.
"체력이 딸린다 싶을 때가 있긴 하지만 눈에 보일 정도는 아니에요." 벌써 노장축인 30대에 접어들었지만 김세진의 승부욕은 나이가 들 줄 모른다. 챔프전 4경기에서 최고기록인 81점을 올렸는데 2위인 신진식(44점)의 두 배나 된다. 동점이나 역전 고비마다 터뜨린 것까지 감안하면 그의 역할은 절대적이었다.
김세진은 지도자의 길을 생각하고 있다. 당장은 내년 우승으로 배구 사상 전무후무한 10연패이지만 은퇴하면 해외에서 배구수업을 받고 지도자로 나설 계획이다. 챔프전 직전 5전3선승제에서 3-1로 승부가 갈릴 것이라고 기자회견장에서 얘기한 것이 맞아 떨어진 것만 봐도 자질은 충분하다. "현대캐피탈의 전력이 급상승해 힘은 몇배 들었지만 배구팬들에게 볼거리를 선사한 것 같아 기쁘다"는 그는 "내년에도 또 우승해야죠"라고 잘라 말했다.
박원식기자 park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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