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들은 이제 솔직해져야 한다. 입시지옥을 견디다 못해 목숨을 버리거나, 거리로 뛰쳐나온 어린 학생들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말이다. "입시를 대학에 맡기자" "본고사를 보면 된다"는 판에 박은 주장을 언제까지 되뇔 것인가. 대학이 마음대로 학생들을 뽑고 본고사를 보면 살인적인 입시경쟁이 사라질 것으로 보는가.
지난 반 세기동안 대학에서 학생들을 선발해온 도구는 수능과 본고사, 내신, 논술, 면접이 전부다. 열 다섯 번에 걸친 입시제도 개선이라는 것은 이를 어떻게 조합 하느냐에 불과했다. 이들 전형요소는 하나같이 점수로 환산된 성적으로 나타난다. 대입제도를 아무리 바꿔도 유일한 잣대는 공부를 잘하느냐, 못하느냐를 가리는 것이었다. 본고사를 막으면 수능이 튀어나오고, 수능을 막으면 내신이 튀어나오는 ‘두더지 머리 때리기’ 게임과 다를 바 없다. 이런 기본적인 틀이 바뀌지 않는 한 전형방법을 둘러싼 논쟁은 무의미하다.
대학들이 창의성과 잠재적인 능력을 가진 인재를 선발하기를 기대하는 것도 어리석다. 그런 도구를 만들어낼 능력도 없을 뿐더러 그런 식으로 뽑고 싶지 않은 게 대학들의 솔직한 심정일 것이다.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가 왜 대접을 받는가. 이들 대학 출신이 정계와 재계 관계 법조계 언론계 등 각계 고위층에 포석해 있기 때문이다. 철저하게 한 명이라도 더 공부 잘하는 학생들을 뽑았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이들 대학은 전국의 모든 수험생을 일등에서 꼴찌까지 줄 세울 수 있는 판별도구만 있다면 얼씨구나 할 것이다.
지금 중요한 것은 대입전형을 국가가 맡느냐, 대학 자율이냐가 아니다. 본고사와 내신의 저울재기는 더더욱 아니다. 그런다고 공교육 파탄과 사교육 팽창으로 요약되는 참담한 교육현실이 개선되지 않기 때문이다. 학교가 입시전쟁터로 변질된 근본 원인이 뿌리깊은 학벌주의에서 비롯된 것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문제는 이를 알면서도 애써 외면하는 풍토에 있다. 그 앞에는 기득권층이 버티고 있다. 학벌사회에서 혜택을 입었고, 자식들에게도 대물림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쟁은 인간의 능력을 극대화하는 가장 합리적인 도구라고 미화하기에 바쁘다. 신자유주의적 경쟁논리를 교육에 적용해 경쟁과 불평등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바람직한 것으로 정당화하고 있다. 이런 논리에서 고교평준화를 해제해 전국의 학교를 서열화 하든지, 아니면 과학고 외국어고, 강남지역 고교에 높은 등급을 부여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공부 잘하는 학생들을 정확히 가려내기 위해 본고사를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우리 학교에서 벌어지는 경쟁은 진정한 실력이나 학업경쟁이 아니다. 장래의 부와 권력을 누가 차지하느냐는 처절한 생존경쟁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높은 서열의 대학에 진입하기 위해 모든 것을 거는 천박한 경쟁이다. 이런 상황에서 창의력과 독창성, 잠재적인 소질과 능력의 개발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사회적 차별과 불평등을 심화하고 학교교육을 황폐화해 국가경쟁력을 떨어뜨린다.
진정으로 학생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국가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학벌주의를 타파해야 한다. 학벌주의를 무너뜨리는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은 대학서열체제를 없애는 것이다. 학벌의 정점인 서울대 학부를 폐지하고 대학원 중심 대학으로 전환하자는 주장과 국·공립대 공동선발과 상호 개방을 골자로 한 국·공립대 통합 네트워크 안 등을 거론하는 학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런 방안을 현실성이 없다고 언제까지나 외면할 게 아니다. 대입제도 개선안을 마련중인 한나라당은 어제 토론회를 열고 본고사 부활과 대학에 학생선발 자율권 부여 추진 방침을 밝혔다. 그러나 그런 표피적인 수준을 넘어 보다 근본적인 논의의 장을 열어야 한다. 대학 서열화와 학벌구조 등 본질을 놔둔 채 본고사가 어떻고, 대학 자율이 어떻고 아무리 떠들어 본들 그 것은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할 뿐이다.
이충재 논설위원cj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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