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 시해범 중 한 명인 일본인 구니토모 시게아키(國友重章)의 외손자 가와노 다쓰미(河野龍巳·84)씨가 사건 110년 만에 방한, 3박4일의 짧은 일정을 마치고 12일 아침 출국했다. 그는 황후가 안장된 경기 남양주시 홍릉에서, 시해 장소인 경복궁 건청궁 옥호루에서 무릎을 꿇고 선조가 저지른 만행을 대신 사죄하며 눈물을 흘렸다. 독도와 교과서 문제 등으로, 여전히 반성할 줄 모르는 일본에 대해 다시금 분노하고 있는 한국인들은 그의 용기 있는 방한을 착잡한 심정으로 지켜 보았다. 일본의 역대 지도자와 가해자 어느 누구도 진심으로 과오를 뉘우치지 않은 상황에서 그의 개인적 참회는 어느 정도의 의미를 갖는 것일까. "이제야 비로소 마음의 짐을 조금이나마 내려놓은 것 같다"는 그를 출국을 앞둔 11일 밤 어렵게 만나 미처 못다한 얘기를 들어 보았다.
- 명성황후 시해 사건과 그 일에 당신의 외할아버지가 가담했다는 것을 처음 안 것이 언제인가.
"외할아버지가 황후 시해 장소에서 가져온 향낭(香囊·향을 넣는 주머니)을 아기 때부터 가지고 놀았다. 물론 그때는 정확히 몰랐다. 소학교 3학년 때 집안에서 할아버지가 남긴 문건과 편지를 일본 국회도서관에 기증하느라 정리할 때가 있었다. 그때 문서들을 보고 ‘아, 외할아버지가 엄청난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렸구나’고 대충 짐작했다."
- 그 뒤 사건을 파악하기 위해 개인적으로 상당히 노력을 기울였다는데.
"이미 20대 때 미우라(三浦) 공사에게 명성황후 시해를 직접 명령 받았던 한성신보의 사장 이다치 겐조를 만나려 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당시 내각 대신이었던 그를 만날 수는 없었다. 훗날에야 만나 얘기를 들었는데 외할아버지가 사건을 앞두고 제물포 항으로 떠나기 전 술 한 병을 몽땅 마셨다는 얘기를 했다. 아마도 외할아버지는 한국의 일본 거류민촌에 와서도 흠뻑 취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야 제 정신으로 일국의 왕비를 시해할 수 있었겠나?"
- 그렇게 해서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전모를 알게 됐을 때 느낌은 어땠나.
"그 사건 이후 외할머니는 외할아버지와 별거를 했다. 이후에도 외할머니는 외할아버지 얘기가 나오는 걸 굉장히 싫어했다. 사건의 전모를 알고 외할머니가 왜 그랬는지 알 것 같았다. 일국의 왕비를 그렇게 살해한 일은 무조건 잘못된 일이며, 한국인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혔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집안에서는 이후로 정치인이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사람을 죽이는 정치인 대신 사람을 하나라도 더 살리는 의사가 되라는 외할머니와 어머니의 뜻이었다. 나는 지금도 구마모토에서 개업의로 일하고 있고 내 아들 3명도 모두 의사다. 10명이 넘는 손자 중 장손도 한의학에 투신했다. 그 정도면 알 만하지 않은가."
- 당신의 외할아버지를 포함해 당시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인들은 어떤 자들이었나.
"한국에는 단순한 ‘낭인’쯤으로 알려졌지만 그들 상당수는 일본에선 당대의 지식인들이었다. 외할아버지도 한때 아사히 신문의 주필 물망에도 올랐던 인물이었다. 그러므로 이 끔찍한 사건 이면에는 당시 일본의 정치, 사상적 흐름과 분위기가 깔려 있음을 알 필요가 있다. 물론 그렇더라도 그들의 행동이 잘못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 한국에 오기까지 결심이 남달랐을 것 같다.
"그렇다. 부인과 아들, 손자까지 다 말렸다. 한국에도 극우 세력이 있지 않나. 위험하다는 말도 많았다. 그러나 명성황후 관련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있는 정수웅 PD가 ‘한국에 가야 할 책임이 있다’고 설득했다. 내가 병원에 안 나가면 당장 환자들이 진료를 못 받게 될 상황이지만 정 PD를 믿었다. ‘그래, 살만큼 살았다. 한국에서 죽을 수도 있다’는 각오를 하고 왔다. 보다시피 난 늙어서 다리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한다."
- 당신은 황후의 능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 또 시해 현장도 둘러보았다. 그 순간의 느낌은 어땠나.
"비통했다. 한편으로는 여태까지 한국에 느껴온 무거운 짐을 비로소 내려놓게 됐다는 느낌도 들었다. 너무 오랫동안 죄책감에 시달려온 때문인지 나중에는 차라리 무심(無心)에 가까워졌다."
- 솔직히 말해 당신의 행동이 많은 한국인에게는 그저 이벤트로 비칠 수도 있다.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과 교과서 왜곡 문제 등으로 한일 관계가 전에 없이 차갑다. 국가나 정부 차원의 제대로 된 사과 없이는 어떠한 개인적 참회도 무의미할 수 있다.
"그렇게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가해자의 후손이긴 하지만 개인에 불과한 나의 참회를 한국민은 따뜻하게 받아들여 주었다. 그런데 하물며 일본 총리나 천황이 와서 자신들의 과오를 솔직히 고백한다면 어떻겠나. 내 행동이 그들에게 분명한 메시지를 던졌다고 본다. 4년 전 구마모토 지역 신문에 내가 향낭을 지니고 있다는 기사가 크게 났지만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다. 올바른 역사를 밝혀야 한다는 인식이 일본에는 별로 없다. 하지만 이제 내가 명성황후 시해 주범의 자손이라는 사실을 만방에 알리고 진심으로 사죄했다. 이번에 일본사회에 던졌을 충격으로 충분히 만족한다. 내가 흘린 눈물을 본 많은 일본인들이 가까운 시일 내에 나처럼 한국에 와서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리라고 기대한다."
- 돌아가서 아들, 손자들에게 할 말이 많을 것 같다.
"그동안에도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대해 아들, 손자들에게 많이 이야기했다. 그러나 젊은 시절 나와 달리 무관심한 것 같다. 그래도 돌아가서 ‘나는 떳떳하게 한국 사람들에게 사죄했다. 그리고 그런 나를 한국 사람들은 따뜻하고 친절하게 맞아주었다’고 얘기하겠다."
- 이번 방한을 계기로 일본에서 관련 활동을 할 계획은 있는가.
"이번에 구마모토 지역의 전·현직 교사 20명으로 구성된 ‘명성황후를 생각하는 모임’ 회원들이 함께 왔다. 일본인들은 이 엄청난 시해사건을 잘 모른다. 우선 일본사회가 이 사건의 의미를 알도록 본격적인 활동을 펼치겠다. 같은 뜻에서 이번에 NHK가 동행 취재를 제안했을 때도 단번에 ‘OK’ 했다. 이제 시작이다."
- 일본의 우경화 분위기가 당신의 그런 계획에 장애가 될지도 모르겠다. 당신의 성향은 무엇인가.
"그렇게 묻는다면 나는 오히려 ‘울트라(ultra) 우익’이라고 대답하겠다. 집안도 대대로 ‘국권파’였다. 구마모토 현의 정신적 지도자로 ‘아시아가 하나가 돼야 한다’고 주창했고, 훗날 ‘대동아공영론’의 이데올로그가 됐던 사사도 마우사가 외할아버지와 매부 처남 사이였다. 나는 일본 호소카와 전 총리의 후원회 회장도 맡았을 정도다. 그러나 지금 일본 극우의 행동은 도리에 크게 어긋난 것이다. 우익이 내 행동에 반발할 거라고? 일본에서 나보다 더 한 우익이 있나? 명백히 잘못된 것은 잘못됐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게 어쩌면 진짜 우익이다."
가와노씨는 인터뷰 말미에 문득 자신이 백제 유민의 혈통일 것이라는 느낌을 갖고 있다고 했다. 아마도 한일 양국이 진정한 이웃이 되었으면 하는 소망을 그렇게 표현한 듯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가해자의 진지한 참회가 전제돼야 함은 물론이다. 그의 이번 방한 목적도 결국 그 뜻의 표현이었다.
김대성기자 lovelily@hk.co.kr
● 가와노씨 방한 어떻게 성사됐나
가와노 다쓰미씨 방한의 중심에는 한국의 대표적 다큐멘터리 감독인 정수웅(62) 연세대 영상대학원 겸임교수가 있었다. 1977년 ‘한국 개항 100년사’를 시작으로 ‘압록강에서 만나는 사람들’ ‘미소의 실크로드’ 등 수작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온 그는 2001년 필생의 작업으로 13부작 ‘동아시아 격동 100년사’를 준비했다.
그런 정 감독의 눈에 지난 100년의 한일 역사 중 미스터리로 다가온 것이 바로 명성황후 시해 사건. ‘아무리 일본이라지만 어떻게 이웃나라 왕비를 무참하게 죽일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한 그의 의구심은 ‘왜 살인을 저지른 일본 낭인들의 대다수가 구마모토 현 출신인가’로 좁혀졌다. 메이지(明治)유신 때 천황에 반대해 소외된 그들은 출세를 위해 무모한 짓을 저질렀던 것이다. 정 감독은 2004년 1년간 13차례에 걸쳐 구마모토 현을 다니며 시해범들의 후손을 만나기 위해 백방으로 뛰었다.
시해범 자손들이 정 감독과의 만남을 수 차례 거부했지만 전직 영어 교사인 가이 도시오(甲斐利雄·76)씨를 만나면서 실마리가 풀렸다. 가이씨와 정 감독은 2004년 11월 20여명의 전·현직 교사들이 주축이 된 ‘명성황후를 생각하는 모임’을 결성했다. 그리고 이 모임을 통해 가와노씨를 설득했다.
그러나 예상대로 설득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가와노씨는 방한을 1주일 앞두고 갑자기 ‘한국에 갈 수 없다’고 말해 정 감독을 당황케 했다. 병원을 비울 수 없다는 게 그 이유. 이야기를 듣자마자 곧장 비행기를 타고 일본으로 날아간 정 감독은 대학에서 침구학을 배우고 있는 손자에게 병원을 잠시 맡기는 해결책을 내놓았고 결국 방한은 성사됐다. 정 감독은 자신이 제작한 2부작 다큐멘터리 ‘명성황후 시해 사건, 그 후손들 110년 만의 사죄’가 8월 SBS와 NHK에서 방영되는 시점에 맞춰 명성황후 시해를 지시한 미우라(三浦) 공사 유가족의 방한을 추진한다. 한편 ‘명성황후를 생각하는 모임’은 회원 수를 늘리고 세미나를 개최하며 시해 사건의 전말을 일본인들에게 알리는 시민 운동을 본격적으로 펼칠 예정이다.
김대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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