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는 수레바퀴의 궤적처럼 실제와 밀착된 이어짐이 아니라, 뚜벅뚜벅 걷는 발자국과 같은 수많은 단절로 이루어진다. 영국 작가 존 버거가 그의 걸출한 책 ‘말하기의 다른 방법’(눈빛 발행)의 한 귀퉁이에 걸쳐둔 말이다. 그는 자신의 오랜 동료 사진작가인 장 모르의 작품들을 두고, 그 단절된 과거의 응축된 이야기들이 따로 또 하나로 모여 긴 이야기를 형성하는 과정을 두고 그런 말을 했거니와, 그가 말한 ‘이야기’의 속성이 사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님은, 인문적 상상력의 근원으로서의 언어의 본원적 한계에 비춰, 토 달아 설명할 일이 아닐 것이다.
90년대 중반 ‘서른, 잔치는 끝났다’라는 시집 한 권으로 당시 출판 시장을 ‘악’ 소리 나게 만든 뒤 이런 저런 에세이집 뒤로 숨어 지내던 최영미씨가 장편소설 ‘흉터와 무늬’(랜덤하우스 중앙 발행)를 들고 나왔다.
61년생 작가의 자전적 성격이 짙은 성장소설이고, 세태 소설이다. 대학시절 학생운동을 했고 20대 중반에 이혼을 한 방송작가 ‘나’를 내세워 그가 유년기부터 40대의 현재에 이르기까지 겪어야 했던 자신과 가족의 이야기들을, 때로는 멀찍이서 경쾌하게, 때로는 내면으로 파고들어 고통스럽게 이어놓고 있다.
경쾌함은 대개, 가난했지만 그 가난과 결핍마저 놀이와 성장의 무대였던 유년 시간들이다. 손톱 밑에 꾸덕살이 박여도 좋았던 공기 삼매경, 좌충우돌의 학창시절 등등. 1~137번으로 짧게 이어지는 지난 시절의 삽화는 그 자체로 이야기일 수 있지만, 존 버거가 권했듯 책을 떠나, 단절된 이야기 속 회상과 상상의 심연을 소요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독법이다.
고통은 어떤가. 생일 날, 뭐 먹고 싶냐는 엄마의 주문에 "참기름에 밥 비벼줘"라고 말한 그 때, 순간 짧게 일그러지던 엄마의 얼굴이 고통스러운 것은 "어미의 황량한 눈가로부터 스무 해를 훌쩍 넘긴" 근년 어느날의 깨우침이다.
"현재가 아닌 과거의 고통은 장식에 지나지 않는다"지만 결코 ‘장식’일 수 없는 고통도 있다. 두 살 위 언니에 대한 추억이 그렇다. 선천성 심장병으로 형제들과 어울리지도 못하고, 수술비가 없어 고아로 조작돼 미국 입양을 떠났던 언니, 16살의 언니는 수술 직후 합병증으로 숨진다. ‘나’의 무의식이 억압했던 언니에 대한 기억을 아프게 복원하는 과정을 통해 책은 가족의 의미, 삶과 생명의 의미를 넌지시 말하고 있다.
시적인 밀도와 감각적 사유의 문장들이, 이미 여러 작가들이 거친 그 시절의 발자국들을 되짚는 작업의 핸디캡을 만회하고 있다.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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