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고종석 칼럼] 민음사만의 일은 아니겠지만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고종석 칼럼] 민음사만의 일은 아니겠지만

입력
2005.05.12 00:00
0 0

일주일에 한 차례씩 ‘시인공화국 풍경들’을 쓰기 위해 오랜만에 시집들과 나뒹굴며, 나는 모국어의 순금부분이 시에 있다는 것을 새삼 확인하게 되었다. 소설을 포함한 산문도, 좋은 글일 경우엔,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지만, 적어도 말 자체의 밀도와 긴장만으로 감동을 빚어내는 힘에선 시에 크게 미치지 못한다. 시를 언어예술의 제왕으로 여기는 것은 그러므로 자연스럽다.

‘시인공화국 풍경들’을 위해 나는 어떤 체계를 짜지는 않았다. 그저 좋은 기억이 남아있는 시집들을 찾아 다시 읽으며 편파적인 독후감을 흘리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잦은 이사로 뒤범벅된 책더미 속에서 어떤 시집을 찾아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김정환의 ‘지울 수 없는 노래’와 이성부의 ‘우리들의 양식’은 집에서 찾질 못해 서점에서 사오고 보니, 작은아이 방 책꽂이에 얄밉게, 나란히 꽂혀있었다. 시집을 좀 보내달라고 출판사에 부탁하기도 하지만, 그것도 처음 한 번이지 계속 그러기는 민망한 노릇이다. 어쩔 수 없이, 서점 나들이가 잦게 되었다.

그런데 서점에 간다고 해서 문제가 늘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교보문고 같은 대형서점에서도 구할 수 없는 시집들이 있기 때문이다. 지난 두 달 남짓 나를 특히 난처하게 만든 것은 민음사의 시집들이었다. 민음사는 시인들이 자기 시집의 발행처로 가장 선호하는 출판사 가운데 하나다. 시대의 슬픈 관행이었던 설립 초기의 해적출판물들을 빼면, 민음사의 출발점은 문학이었다. 출판사의 명성이 자란 것도 문학을 통해서다. 이 출판사의 ‘오늘의 시인총서’와 ‘민음의 시’에는 문학사가 누락시킬 수 없는 좋은 시집들이 점점이 박혀있다. 그런데 서점에 그 시집들이 없었다.

김영승의 ‘반성’을 사기 위해 간 교보문고에서 이 시집이 절품됐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그럴 수도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내키지 않는 전화를 출판사에 해 시집을 얻었고, 독후감을 흘렸다. 김종삼의 ‘북 치는 소년’이 절품됐다는 것을 그 얼마 뒤에 알았을 때는 기분이 좀 묘했다. 그렇지만 꼭 다뤄야 할 시집이라는 생각에서, 정말 내키지 않는 전화를 출판사에 해 책을 얻었다. 나는 지난주에 역시 교보문고엘 갔다가 박재삼의 ‘천 년의 사랑’과 박용래의 ‘강아지풀’이, 아니 읽을 만한 민음사 시집들 상당수가 절품됐다는 것을 알았다. 출판사에 부탁하면 이 시집들도 얻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나는 이쯤에서 포기하기로 했다. 한국 최대의 서점에서도 구할 수 없는 시집을 읽어보라고 신문 독자들에게 권하는 것은 미친 짓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민음사가 이 시집들을 더 찍어내지 않는 것이 문학적 판단에서는 아닐 것이다. 김종삼이나 박재삼이나 박용래를 문학적 이유로 살해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민음사가 이 시집들을 죽인 것은 잘 팔리지 않아서일 것이다. 그것은 민음사만의 일이 아닐 것이고, 시장사회의 엄중한 규율이기도 하다. 아무튼, 자회사들을 포함하면 연간 매출이 300억원에 이른다는 대형 출판사가 경제적 타산으로 이 시집들을 죽인 것은 어색해 보이기도 하고 걸맞아 보이기도 한다. 그것이 어색해 보이는 것은, 그만한 규모의 출판사라면 문학적 가치를 위해 약간의 경제적 손실은 감수할 수 있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그것이 걸맞아 보이는 것은, 그런 독실한 시장숭배가 민음사를 이 만큼 키워냈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래도 찜찜함은 남는다. 민음사 박맹호 회장은 얼마 전 대한출판문화협회 회장 선거에 나서며 "책은 없었습니다!"라고 외쳤다. 텔레비전의 공익광고가 대중예술에만 눈길을 줄 뿐 책은 홀대한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공익광고에서는 몰라도 대형서점에는 책이 넘쳐난다. 그 넘쳐나는 책 가운데 김종삼의 ‘북 치는 소년’이 없다는 것은 대한민국 출판문화의 부끄러움이고 민음사의 부끄러움이다.

aromachi@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