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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공화국 풍경들-고종석의 詩集산책] (10) 朴賞淳의 'Love Adagio'-우울한 놀이공원의 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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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공화국 풍경들-고종석의 詩集산책] (10) 朴賞淳의 'Love Adagio'-우울한 놀이공원의 幻

입력
2005.05.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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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개의 강아지 인형을 지키는 옷장 속의 인간

창밖에는 비 오고요. 바람이 불고요.

그대의 창백한 얼굴이 가슴에 있네요

문밖에는 비 오구요. 바람이 불고요.

그대의 창백한 얼굴이 발 아래 있네요

창밖에는 비 오고요. 바람이 불고요.

그대의 창백한 얼굴이 등 뒤에 있네요

문밖에는 비 오고요. 바람이 불고요. 나는,

그대의 창백한 얼굴이, 나는, 열 개나 있네요

박상순(43)의 시집 ‘Love Adagio’(2004년)를 대하는 독자는, 그가 진지한 독자일수록, 당혹스러움을 느낄 것이다. 가장 완고한 독자라면, 표지를 보자마자 대뜸, "한국 사람이 한국어로 쓴 시집 표제가 Love Adagio? 반은 영어고 반은 이탈리아어네. 외래어든 외국어든 한글로라도 표기할 수 있었을텐데, 왜 굳이 로마자로? 쯧쯧..." 하며 애국심을 내비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보다 덜 완고한 독자일지라도, 작품 몇 편을 읽어본 뒤, "이게 도대체 뭐라는 소리야? 시가 장난이야?"라고 투덜거리며 시집을 내던져 버릴지 모른다. 물론 그래도 된다. 내던져서는 안될 만큼 중요한 시집은 이 세상에 없다. 그렇지만, 시집을 내던지기 전에, 75페이지를 펼쳐보자. "그때도 나는 K의 옷장에서/ 놀이공원 지도를 보았습니다.// 롤러코스터, 휴게소, 작은 광장, 매표소,/ 분수, 징검다리, 유령의 집, 전망대"(‘의사 K와 함께’)라는 활자들이 보일 것이다. 시집 ‘Love Adagio’를 그렇게 봐줄 수는 없을까? 무슨 말이냐 하면 시인공화국의 놀이공원으로, 디즈니월드로 말이다. 지금까지 산책을 하며 우리가 들른 시의 집들은, 썩 색달라 보였던 성미정의 ‘대머리와의 사랑’이나 노향림의 ‘눈이 오지 않는 나라’까지 포함해, 그 안에 의미의 켜를 가지런히 정리해 놓고 있었다. 그 곳들은 대체로 시인들의 일터였고 더러는 쉼터였을 뿐, 놀이터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사람이, 시인들까지 포함해서, 늘 가지런한 정신으로 가지런한 말만 하며 살 수는 없다. 말의 욕망은 들끓고 있지만, 현실세계의 질서를 그 말 속에 곧바르게 운반할 기력이나 의지가 없을 때가 있다. 또는 그저 명징성이 권태로울 때가 있다. 몸뚱이로 말을 통제하기보다는 말의 우연적 기동(起動)에, 그 좌충우돌의 생동과 섭동과 뒤흔들림과 들썩거림과 꿈지럭거림에 몸뚱이를 맡겨놓고 싶을 때가 있다. 그 때의 말은, 위에서 한 가상의 독자가 투덜거렸듯, ‘장난’에 가까울 것이다.

그렇다. ‘Love Adagio’를 채우고 있는 활자들은 일종의 장난이다. 그리고 시가, 특별한 얼개의 언어형식으로서, 장난이 돼서는 안 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장난이라는 말이 속되게 들린다면 놀이라고 해도 좋다. 꿈과 환상의 ‘박상순랜드’에서 벌어지는 놀이. ‘Love Adagio’는 한 시인의 머릿속에 세워진 놀이공원이고, 시인이 체험하는 한바탕의 우울하고 어수선한 꿈과 환상이다. 그 놀이들, 그 꿈과 환상들은 한 번쯤 끼여들어 보고 싶을 만큼 현란하다. 문을 삐걱 열고 이 놀이공원에 살짝 발을 들여놓아 보자.

‘Love Adagio’는 무엇보다도 우연의 공간이다. 서문에 따르면, "시는 가나다, 숫자, 알파벳 순으로 배열한다. 다만, 첫 시는 짧게, 마지막은 ‘마지막’이니까." 과연, 이 시의 집 안에서 시들은, 첫 시 ‘빨리 걷다’와 마지막 시 ‘피날레 Finale’를 빼고는, 제목을 기준으로 가나다, 숫자, 알파벳 순으로 배열돼 있다. 우연히 ‘가을이 오면’이라는 표제를 달게 된 시는, 우연히 ‘나에게 길이 있었다’라는 표제를 단 시보다 앞에 있다. ‘가을이 오면’의 첫 글자가, 한글 자모 순서에서, ‘나에게 길이 있었다’의 첫 글자보다 우연히(기역이 니은에 앞서는 게 필연은 아니다) 앞서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우연적 배열은, 시의 제목이 정해졌을 때 이미 확정됐다는 점에서, 필연에 가까울 만큼 어기찬 우연의 소산이다.

이 우연성은 시들의 배열에만 도사리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낱낱의 시 안에서, 이미지들은 현실세계의 질서를, 그럴 듯한 인과율을 뿌리치며 제멋대로 약동한다. 시집 속의 한 화자는 "한 걸음만 더 디디면 떠나왔던 그 자리가 사라질지도 몰라요"(‘자유의 여신’)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 진술은 ‘Love Adagio’ 풍경 전체를 요약하고 있다. 시집의 화자들은, 그리고 독자들은, 마치 토끼를 따라 이상한 나라로 들어간 앨리스처럼 얼떨떨하다. 쫓아가던 대상이 어느 순간 가뭇없이 사라지는가 하면, 생각지도 못했던 것들이 아무 때나 아무 데서나 튀어나온다. 경기도에서 버스를 타면 "검은 모자를 쓴 타조가 운전을 하고 검은 안경을 쓴 물개가 내 옆에 앉아 더 큰 세상, 더 큰 세계, 이런 것에 대해 물어볼지도"(‘자유의 여신’) 모른다. 이미지들의, 장면들의 이런 불연속성은 ‘Love Adagio’의 풍경에서 현실감을 앗아간다. 별일 아니다. ‘Love Adagio’는 놀이공원이니까.

‘Love Adagio’의 화자들은 더러 환각상태에 있는 듯도 하다. 그 때 그들은, 마약에 취해, 제가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떠오르는 장면들을 올가미로 낚아채는 이미지 채집광 같다. 그들이 환각상태에서 보거나 ‘재현’하는 것이 반드시 일차적 현실은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그들의 기억 속에서 스멀거리는 책, 영화, 그림, 광고, 노래 속의 인물들이나 상황들이다. 그 화자들이 이런 대상들을 ‘재현’한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논리의 실타래를 잃어버린, 차라리 그 실타래를 팽개친 그들은 무의식 깊숙이 자리잡은 제 욕망에 따라 그 대상들을 멋대로 왜곡한다. 그래서, ‘Love Adagio’에 가수 김윤아나 소설 주인공 파니 프라이스(‘가수 김윤아’)가 나오든, 철학자 칸트(‘아주 오래된 숲에 대하여’)나 다리파 화가들(‘침묵의 뿌리’)이 나오든, 아니면 숲 속의 온갖 무덤들이 나오든, 그것들이 원텍스트나 현실 속의 대상으로부터 취하고 있는 것은 오직 그 이름뿐이다.

그렇지만, ‘침묵의 뿌리’라는 작품에 이름을 내미는 키르히너나 오토 뮐러나 코코슈카를 빌미로 ‘Love Adagio’를 하나의 회화 세계로 본다면, 그것은 표현주의 이래의 대담한 데포르마시옹에 가까울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그림을 전혀 배운 적 없는 어린아이가 곧이곧대로 그린 소박한 구상화일 수도 있다. 아이들은 저만의 무구한 눈길로 본 세계를 저만의 무구한 언어로 표현한다. 그러나 어린아이의 그 해방된 단순성에 포획된 리얼리티는, 허용된 관점에 익숙한 어른들의 눈엔 기괴한 환상의 세계로, 환각의 처소로 보일 수 있다.

니, 실제로 ‘Love Adagio’의 화자들이 환각 취향일 수도 있다. ‘강원도는 싫어요’의 화자는 "싫어요. 강원도는 싫어요. 풀들이 있고, 바다가 있고, 봉평 메밀꽃이 있고, 소양강 안개가 있고, 아우라지 나루가 있고, 계곡이 있고"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반어법일 수도 있겠지만, 혹시 그는 정말로 건강한 것, 생기 있는 것, 자연적인 것을 싫어하는 게 아닐까? 그에게는 늘 산소가 좀 부족한 듯한 상태가, 몽환상태가 편한 것 아닐까? ‘Love Adagio’는 한편으로 불안한 아름다움의 세계이기도 하다. 고스란히 노래 가사로 채용해도 좋을 만큼 리드미컬한 ‘벽에서 풀이 돋아요’나 ‘10개의 강아지 인형을 지키는 옷장 속의 인간’ 같은 작품에서도 아름다움이 불안에 버무려져 있다. 이 노래들은 공포영화의 주제가로 제격일 것이다.

시집 ‘Love Adagio’의 화자가 만일 단일인물이라면, 그는 히포크라테스가 상정한 우울질 인간일 것이다. 표제시 ‘Love Adagio’나 ‘물 위의 암스테르담’에 배어있는 습기는 흑담즙(黑膽汁)의 습기다. 흑담즙질의 인간이 반드시 고독한 것은 아니지만, ‘Love Adagio’의 화자에게 고독은 우울의 한 효과인 듯하다. 그는 고독한 몽환가다. 몽환 속에서 그는 혼자 미로를 헤맨다. 실연시로도 읽힐 법한 마지막 작품 ‘피날레 Finale’의 마지막 연 "기억하라. 주차장은 왼쪽/ 기억하라. 주차장은 1층에 있다"는 익살스러우면서도 서럽다. 화자의 축축한, 우울한 고독이 거기서 울렁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말에 대한 시인의 과민한 감각에 더러 마음이 서늘해지는 것도 ‘Love Adagio’를 읽는 재미 가운데 하나다. 명사를 의태어로, 부사적으로 사용하면서 이를 다시 비틀어 걸음의 통통 튀는 느낌을 자아내는 "발, 발, 발, 밤, 밤, 밤"(‘빨리 걷다’) 같은 표현이나, 보이지 않는 것을 또렷이 보게 만드는 "칠월이 가고 팔월이 온다. 여름이 두 다리를 벌리고 굴뚝 위에 올라앉는다"(‘침묵의 뿌리’) 같은 표현 앞에서 내 마음은 서늘하다. 이런 대목들은 ‘Love Adagio’에 출렁이는 시인의 능변이 겉보기와 달리 세심히 조율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짐작을 낳는다. 그렇다면 박상순은 조각가가 끌로 돌을 쪼듯 언어로 제 뇌를 쪼아 이 낯선 세계를 조각해낸 것이다. 그는 세계를 재현하지 않고 세계를 설계했다. 창세기의 신(神)처럼. 과연 새로운 세계다. 아스라한 환(幻)의 세계, 아슬아슬한 헛것의 세계.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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