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1년 7월19일 양유찬 주미 대사는 미 국무부를 방문, 대일 강화조약(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체결을 전담하고 있던 존 덜레스 국무장관 고문을 만났다. 5월3일 성안되고, 6월14일 개정된 대일 강화조약 미·영 합동초안에 대한 한국 정부의 의견서를 전하기 위한 회담이었다. 의견서는 초안 제2조 a항의 ‘일본은 조선의 독립을 승인하고,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를 포함한 조선에 대한 모든 권리, 권원 및 이익을 포기한다’에 독도와 파랑도(波浪島)를 병기해 달라는 등의 요구를 담고 있었다.
■ 한국의 요구는 미국측 1차 초안(47년 8월)~5차 초안(49년 11월)이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 리앙쿠르암(Liancourt Rocks·독도)’을 일본이 포기해야 할 곳으로 명기했던 것이 달라진 데 대한 항의이기도 했다. 일본 주장에 경도된 윌리엄 시볼드 주일 정치고문의 입김으로 미국측 6차 초안(49년 12월)~9차 초안(51년 3월)에는 독도가 일본 영토에 포함됐다. 영국이 이에 강한 의문을 제기한 결과 독도를 ‘일본 영토’나 ‘일본이 포기해야 할 지역’ 양쪽에서 다 뺀 연합국 초안이 만들어졌다.
■ 독도를 ‘일본이 포기할 지역’에 명기해 달라는 한국 정부의 요구를 미국은 수용하지 않았다. 8월10일 딘 러스크 미 국무부 극동담당 차관보는 주미 한국대사관에 공문을 보내 한국의 조문 수정 요구가 거부됐음을 알렸다. 51년 9월8일 조약 조인 때까지 독도 관련 조항은 수정되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영유권 논란의 불씨를 간과하지 않았다. 이승만 대통령은 조약 발효를 100일 앞둔 52년 1월18일 ‘해양주권선언’으로 독도를 ‘평화선’ 안에 넣었다. 외교 실패를 단숨에 만회한 단호한 조치였다.
■ 뒤늦게 ‘이승만의 눈물’이 발굴돼 잔잔한 감동을 부르고 있다. 72년 리처드 닉슨 미 대통령이 저우언라이(周恩來) 중국 총리에게 전한 일화가 기록으로 남았다. 53년 부통령 시절 이 대통령에게 ‘북진통일’에 대한 미국의 강한 반대를 알리자 이 대통령이 눈물을 흘렸다는 내용이다. 묻힌 것이 그의 눈물뿐일까. 독도 열기 속에서 누구나 ‘일본의 독도 강탈’을 얘기하지만, 아무도 그 독도를 되찾은 과정은 말하지 않는다. 패자라도 강자가 존중되던 당시의 냉엄한 국제정치 현실을 돌파, ‘실효적 지배’의 기초를 닦은 ‘이승만의 결단’도 이야기하자.
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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